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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24. 2023

역사의 흐름을 명랑하게 거스르는 드라마

이슬아의 《가녀장의 시대》를 읽고

#가녀장의시대 #이슬아



살림을 직접 해본 사람은 안다. 집을 치우고 쓸고 닦고,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오전 9시 반에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는데, 집안일 몇 가지를 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 3시 하원 시간이 된다.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책임으로 살림을 맡아 본 사람은 안다. 그 시간을 아끼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육아휴직 기간 동안 둘 다 등원시키고 나면, 나는 집의 상태가 어떻든 눈을 감아버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가 아니면 온전히 나만의 즐거움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하원 이후에 할 일이 두세 배로 많았지만 그게 더 나았다.



살림 노동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치워도 치워도 청소는 끝이 나지 않는다. 요리는 매 끼니 새로 시작해야 한다. 회사에서 일할 때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일을 하는데, 아무리 해도 통장에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소설 《가녀장의 시대》에는 살림 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 나온다! 슬아는 낮잠출판사의 대표로, 모(母)인 복희와 부(父)인 웅이를 직원으로 두고 있다. 낮잠출판사는 집밥을 매일 먹는 집이자 회사이기에, 슬아는 '정식으로 복희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복희는 음식을 만드는 데만은 천재다.'(p.41)



낮잠출판사에는 상여금 제도도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된장 보너스'와 '김장 보너스'이다. 된장을 만들기 위해 복희가 본인 모부의 집으로 세 차례 출장을 갈 때, 회당 이십만 원씩 지급되는 보너스이다. 김장 또한 매년 초가을마다 복희 모부의 집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김치를 갖고 오면 보너스가 지급된다. 이렇게 살림 노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가치를 인정하는 슬아도 '가부장의 실패를 반복했다'(p.233)고 느낄 때가 있다. 가족들은 복희가 정성스레 준비한 매 끼니 식사에 매번 감사하지 않는다. 복희 자신도 지나간 식사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슬아는 상상한다. 밥은 책처럼 복사가 되지 않아서 매번 다 차려야 하는데, 과연 글을 그렇게 써야 한다면 어떨까.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p.228) 슬아는 본인이 여성인데도 '종종 복희의 부엌과 음식을 소외'(p.233) 시켰다고 느낀다.



가부장제에서 자랐다면, 누구든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녀장 슬아의 솔직한 고백에 엄마의 '밥 먹자'라는 소리를 귀찮게 들었던 기억들, 시어머니가 보내 준 반찬이 너무 많다며 투덜거렸던 기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아이들이 내가 한 밥과 반찬에 입도 대지 않고 '먹지 않겠다'라고 외칠 때 화가 났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나는 '부엌일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에'(p.233) 종종 실패하고, 부엌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종종 허무함을 느낀다.



살림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가부장제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가녀장의 이야기는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장르가 소설이라 실제와는 많이 왜곡되고 변형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여전히 등장인물의 이름이 실존 인물의 이름과 같아 기뻤다. 소설 속 가족이 어느 정도 실재할 가능성을 열어 주는 느낌이었다. 완벽한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길고 뿌리 깊은 역사의 흐름을 명랑하게 거스르는 인물'(p.311)들의 이야기를 앞으로도 계속 읽고 싶다. 사랑과 권력과 노동과 평등과 일상에 대한 이슬아 작가의 공부가 더 많은 책으로, 드라마로 나오기를 희망한다.




#이야기장수 #장편소설 #북스타그램 #책추천 #서평 #대체텍스트

#그리고드라마로나온다네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흰색 천 위에 책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놓여 있다. 책 위에 유리구슬이 네 개, 책 표지 우측 상단에 유리구슬이 한 개 놓여 있다. 햇빛이 위쪽에서 들어오고 있어서 구슬 아래쪽으로 그림자가 진다. 책 표지는 형광색 톤으로 색이 맞춰져 있다. 표지 가운데 커다랗게 주인공 가녀장의 얼굴이 있다. 가녀장은 신문지로 만든 관을 쓰고, 꽃무늬 옷을 입었고, 길고 까만 머리에 오른손에 전자 담배를 들고 있다. 가녀장의 머리 위에 제목인 '가녀장의 시대'가 있고, 얼굴 오른쪽으로 '이슬아 장편소설'이 쓰여 있다. 가녀장 얼굴 아래에는 향이 피워진 향로와 배추 치마를 입고 있는 여성이 있다. '모생아신 부국오신'이 쓰인 병풍도 살짝 보인다. 책 표지 우측 하단에는 출판사 이야기장수가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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