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비 May 25. 2023

모든 이야기는 끝이 있어

유디트 헤르만의 《단지 유령일 뿐》을 읽고

#단지유령일뿐  #유디트헤르만



돌아보니 이미 마음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나는 그를 계속 생각했던 걸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짧은 장면들이었다. 동글동글한 안경을 쓰고 웃으며 인사하던 모습? 종이컵 가득 사탕을 담아주던 모습? 가볍게 스쳤던 시간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어느새 자라버린 감정이 자꾸 고개를 들어서, 당시 만나던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애써 그를 잊으려고 노력했었다. 



독일 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적인 순간들과 마주한다. <루스>의 루스는 '나'에게 라울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해달라 한다. '나'는 이 순간 라울과 어떤 방식으로든 얽히게 될 거라 직감한다. <차갑고도 푸른>의 요니나는 요나스의 요청으로 일행과 다 같이 사진기 렌즈 앞으로 달려간다. 이 순간 그녀가 연인 마그누스에게 품었던 감정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요나스에게 슬쩍 넘어간다.'(p.98) 



나는 그 이후로 많은 순간 그를 떠올렸다. 당시 그와 나에게는 서로 만나던 사람이 있었다. <단지 유령일 뿐>의 엘렌과 펠릭스처럼 나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로에게 지쳤고,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여행 중 낡은 호텔의 바에서 아이에게 작은 운동화를 사주는 행복에 대해 듣는다. 어쩌면 사소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는 관계를 다시 이어주었고, 나중에 그들은 아이를 낳고 함께 산다.



횟수를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그와 짧게 만났다. 나는 결말을 바꾸고 싶었던 걸까? 아니다. 그와 헤어지고 나면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에 나오는 문구와 비슷한 말들이 맴돌았다. '그런 밤은 지나간다. 흔적 없이. 그리고 또 다른 밤들이 온다.'(p.272) 만나던 연인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였고, 아마 그의 관계도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의 '나'가 말하듯, "모든 이야기는 끝이 있어."(p.236)라고 되뇌었다.



<차갑고도 푸른>의 요니나처럼, 나는 그를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것은 간단하지만, 그녀는 그만두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그만둔다. 그것 대신 다른 것이 시작될 거라는 것 없이 뭔가 끝나 가는데도. 그건 요니나에겐 새삼스럽고 전에는 전혀 경험한 적 없는 상황이다. 요나스를 생각하지 않고 잠드는 건 힘이 든다. 하지만 그를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p.106)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반짝거리는 눈, 놀라움, 달콤했던 순간을 지나간 시간에 묻었다. 



더는 그를 만나지 않게 된 어느 날, 커다란 달이 떴다. 달은 어둑한 방 한가운데까지 환하게 빛을 채웠다. <아리 오스카르손을 향한 사랑>에서 '나'가 오로라를 보며 행복을 찾았듯, 나도 달을 보다 스르르 마음이 가벼워졌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 현무암과 용암으로 만들어진 바다, 크레이터와 계곡, 내가 아는 것은 고작 이 정도. 우주에서 보면 나는 한낱 작은 먼지. 보내야 하는 순간을 놓지 않으려 애쓰지 말아야지. 뭐든지 시간이 필요한 거니까.




#민음사 #북스타그램 #서평 #소설집 #대체텍스트 #독일문학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회색 천 위에 책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책 위쪽에는 흰 꽃 여섯 송이가 아래쪽으로 향하게 놓여 있다. 책 표지는 흰색이고, 책 표지 좌측 상단에는 제목 '단지 유령일 뿐', 우측 상단에는 '유디트 헤르만 박완규 옮김'이 있다. 책 표지 중앙에는 마른 튤립과 튤립을 들고 있는 여성의 두 손을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 아래에는 노란 상자 안에 '모던 클래식 071' 'Nichts als Gespenster. Judith Hermann'이 쓰여 있다. 책 표지 하단 좌측에 '민음사'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역사의 흐름을 명랑하게 거스르는 드라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