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목적과 그에 부합하는 설계가 우선.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논의가 국내외 금융권과 블록체인 산업 전반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정작 이 기술을 어떤 목적과 구조로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충분히 던져지지 않고 있다. 특히 한국은 가상자산 거래량 기준으로 세계 상위권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이블코인을 제도적으로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운용할지를 결정하는 기본 구조 설계가 전무한 상태이며, 이는 민간과 정부가 모두 디지털 자산의 표면만 소비하고 있다는 근본적 문제의식으로 연결된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 1~2년 사이에 실물자산 기반 토큰화 시도가 급증하고 있고, 관련 기업들의 시장 진입도 활발하지만, 제도와 인프라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 산업과 규제가 따로 노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제대로 설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질문이 먼저 필요하다.
첫째, 스테이블코인을 왜 만드는가라는 목적의 문제가 있다. 단순히 결제 속도 향상을 위한 것인지, 자산 보관 수단인지, 아니면 글로벌 송금 수단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각각의 목적은 설계 구조에 영향을 미치며, 목적이 다르면 담보 방식이나 유통 구조, 투자자 보호 체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둘째, 스테이블코인을 누가 발행하고 통제할 것인가라는 구조의 문제가 있다. 민간이 발행하는 경우 통제권이 분산되어 리스크가 커지고, 정부가 직접 발행할 경우엔 민간 혁신과 경쟁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에, 발행 주체와 책임 주체 간 권한 배분에 대한 구조적 설계가 필요하다.
셋째, 스테이블코인이 담보로 삼는 자산이 무엇이며, 그 자산이 실질적으로 회수 가능하고 신뢰 가능한가라는 금융적 안정성의 문제가 있다. 단순히 1달러에 고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담보 자산이 언제 어떻게 회수될 수 있으며, 시장 충격에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설계적 판단이 병행돼야 한다. 이처럼 기술이나 상품 이전에 구조 설계가 선행돼야 하고, 지금은 바로 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글로벌 자산운용사 블랙록과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이미 구조 설계 차원의 실험을 현실화하고 있다.
블랙록은 BUIDL이라는 디지털 유동성 펀드를 이더리움 기반 블록체인에 토큰화하여 발행했고, 이는 frxUSD라는 형태의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돼 실시간 거래와 환매가 가능한 형태로 운용되고 있다. 이 구조는 단순히 토큰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미국 국채나 현금 등 전통적인 고정수익 자산을 담보로 삼고, 이를 실시간으로 회전시키면서도 온체인 상에서 안정적으로 유통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결국 블랙록은 기관투자자의 장기 자금이 퍼블릭 블록체인으로 유입될 수 있도록 제도와 자산 구조를 연결하는 설계를 완성한 셈이며, 이는 스테이블코인을 매개로 기존 금융시스템과 디지털 자산시장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JP모건은 JPMD라는 예치 토큰을 설계하고 있다. 이 토큰은 은행 내 예금을 1대1로 디지털 토큰화한 것으로, 코인베이스가 만든 퍼블릭 블록체인인 베이스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다. 이 구조는 예금자의 자산이 은행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즉시 입금과 출금이 가능하며, 예금자 보호와 이자 지급 기능까지 포함된 실물 기반의 디지털 결제 자산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암호화폐와는 전혀 다른 금융 상품이다. JP모건은 이 구조를 활용해 국경 간 결제 속도를 높이고, 펀드 환매나 기업 자금 운용을 위한 새로운 온체인 금융 인프라로 확장할 계획이다. 블랙록이 펀드 기반 유동성을 설계한 것이라면, JP모건은 예금 기반 실시간 결제를 설계한 셈이고, 두 기업 모두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제도화된 금융 자산으로 바꾸는 기반 설계에 집중하고 있다.
결국 지금 한국이 던져야 할 질문은 스테이블코인을 만들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만들고 어떤 구조로 설계할 것인가이며, 이러한 질문 없이 단순한 기술 도입이나 용어 도입에 그친다면, 블록체인 시대의 결제 혁신은 한국을 비켜가게 될 것이다.
김용범 실장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설계도'
2023년 10월, 김용범 당시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는 「디지털 G2를 위한 원화 스테이블코인 설계도」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이 디지털 시대의 통화 주권을 지키고 글로벌 디지털 금융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대한 본격적인 정책 설계와 실행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단순히 암호화폐 기술의 응용 차원이 아니라, 스테이블코인이 향후 세계 금융질서 재편에 있어 ‘디지털 달러’와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의 전략자산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 한국도 “디지털 G2”, 즉 디지털 통화체계에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김용범 실장이 강조한 핵심은 기존의 은행 중심, 정부 주도의 안정지향적 통화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통화 신뢰는 중앙은행 보증, 은행 면허, 예금자 보호라는 제도적 프레임에 의존해 왔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는 신뢰가 코드와 설계, 즉 스마트 계약, 담보 공시, 리저브 감사, 알고리즘 기반 환매 설계 등 ‘기술적 구조’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스테이블코인의 본질은 통화의 디지털화가 아니라 통화 신뢰 구조의 재설계라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그는 특히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가 정부나 은행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비은행 민간 기업들이 주도하는 협력형 발행 구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은행은 원화 기반의 신탁 자산을 제공하고, 핀테크 기업이 블록체인 기반 발행 인프라를 구축하며, 커스터디 기업은 담보 자산을 보관·관리하고, 증권사 등은 유통과 운영에 참여하는 다중주체 협력모델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델은 단순히 특정 기관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각 주체의 기능과 신뢰 책임을 명확히 분산하는 구조를 기반으로 해야 하며, 이를 통해 위험을 최소화하면서도 혁신을 최대화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한 김 실장은 현재 한국 금융당국과 정책 당국이 스테이블코인을 위험자산으로 규정하고 규제 대상으로만 접근하는 시각을 비판하며, 단순 규제 대응을 넘어 제도 설계를 주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위험 통제를 은행에 맡기는 방식은 결국 혁신을 차단하게 될 것”이라며, 지금은 ‘규제의 시기’가 아니라 ‘설계의 시기’라고 단언했다. 특히 미국은 이미 민간 주도의 USDC와 같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디지털 달러의 국제 통화 패권을 강화하고 있고,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국가 주도로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전략적 판단 없이 대응만 한다면 통화 주권은 외세에 의해 잠식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결국 김용범 실장이 이 보고서에서 제시한 궁극적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스테이블코인은 지금까지의 화폐를 단순히 디지털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설계로 대체하는 통화 구조의 전환점이다. 둘째, 이 설계를 은행 중심으로 할 것이 아니라 민간·비은행 주체가 주도하는 생태계 모델로 설계해야 한다. 셋째, 지금은 규제를 고민할 시기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구조로 어떤 목적의 스테이블코인을 만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설계의 시기다. 넷째, 한국은 이 기회를 통해 디지털 달러와 디지털 위안에 대응하는 ‘디지털 원화’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을 전략적으로 설계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G2로 도약하기 위한 통화 주권의 핵심 열쇠라고 판단했다.
이 보고서는 단순한 기술적 제안이 아니라, 통화체계의 방향성과 금융정책의 전략적 전환에 대한 선언이었으며, 김용범 실장이 대통령실 정책실장에 취임한 이후 한국형 스테이블코인 정책의 이론적 기반이자 실무 구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정책적 의미가 크다.
김 실장의 주장을 뒷바침할 이론들.
2023년 10월, 김용범 당시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는 디지털 G2를 위한 원화 스테이블코인 설계도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하며, 한국이 디지털 통화 질서 속에서 글로벌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앙은행 주도의 CBDC 발행을 넘어서 민간 주체가 중심이 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닌 통화 주권의 전략적 수단이자 디지털 경제 패권의 핵심 인프라로 보았으며, 한국이 디지털 달러와 디지털 위안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이야말로 제도 중심 통화 질서에서 벗어나 설계 중심의 통화 구조 전환을 실행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전통적 금융 시스템이 중앙은행의 보증, 은행 면허, 예금자 보호 등을 기반으로 신뢰를 형성해 왔다면 디지털 시대의 통화는 스마트 계약, 알고리즘 기반 상환, 담보 자산 실시간 공시 등 설계된 메커니즘 자체가 신뢰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하며, 이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제시한 제도 기반 신뢰에서 구조 기반 신뢰로의 전환 이론과 맞닿아 있다. 다시 말해 법과 제도가 보증하던 과거의 신뢰 체계는 점차 코드와 설계로 대체되고 있으며, 김용범 실장은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을 스테이블코인의 설계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정부나 은행이 발행을 독점하는 방식은 시장의 유연성과 혁신을 억제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고, 대신 핀테크, 커스터디 기업, 증권사 등 다양한 민간 주체가 기능별로 협업하는 구조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분산적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발상은 하이에크가 1976년 화폐의 민영화에서 주장한 민간 화폐 발행 경쟁 이론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하이에크는 국가가 통화를 독점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여러 민간 주체가 경쟁적으로 발행하는 화폐야말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통화 신뢰를 높일 수 있다고 보았는데, 김용범 실장은 디지털 환경에서 이 개념이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은행 중심 위험 통제 모델을 고수할 경우 금융 혁신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며, 한국 정부가 스테이블코인을 단순 규제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책 설계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러한 입장은 최근 정책학과 공공행정에서 떠오르고 있는 설계 기반 정책이나 넛지 거버넌스와 일맥상통하는 접근으로, 규제보다는 구조와 유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현대 정책 프레임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단언했다. 지금은 규제의 시기가 아니라 설계의 시기이며, 디지털 통화 질서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한국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제안한 구조는 명확하다. 은행은 원화 기반의 신탁 자산을 제공하고, 핀테크 기업은 블록체인 기반 발행 시스템을 운영하며, 커스터디 회사는 담보 자산의 실물 보관을 담당하고, 증권사는 유통과 환매를 관리하는 다중 주체 협력 구조이다. 이러한 설계는 탈중앙화 금융의 기술적 요소를 기반으로 하되 완전한 탈규제나 무정부적 체계가 아닌 역할이 분산되고 책임이 나뉜 모듈형 금융 아키텍처에 가깝다. 이 구조는 블랙록이 디지털 유동성 펀드를 토큰화하여 기관 자금을 온체인에 유입시키려는 방식이나, JP모건이 예치 토큰을 통해 실시간 예금 기반 결제 구조를 설계한 접근과도 유사하며, 디지털 통화가 실제 금융 시스템에 통합되는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글로벌 흐름과도 부합한다.
끝으로 그는 한국이 이러한 전략적 판단을 지금 내리지 못한다면 가까운 미래에 통화 주권은 디지털 달러나 위안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며, 이대로 가면 글로벌 금융질서에서 디지털 속국이 될 것이라는 강한 경고를 남겼다. 따라서 스테이블코인 설계는 금융혁신의 선택지가 아니라 통화정책의 최전선이며 국가전략 그 자체라는 것이 그의 최종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