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는 무거운 마음으로 열차에 올랐다. 달러벌이를 위해 씨받이로 끌려가는 자신이 서글퍼서가 아니라, 자신을 구하기 위해 지오가 길을 떠났다는 연락 때문이었다. 지하세계 인간이 지상으로 나가는 것은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그 반대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지상세계 인간이 지하세계 시민권을 얻으려면 두 가지 자격 중 적어도 하나가 필요했다. 생식능력이 있거나, 인공지능(AI)이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을 갖고 있어야 했다. 가끔 지하세계로 밀입을 시도하는 지상세계의 인간들이 있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없었다. ‘시스템 원’의 감시망을 뚫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시스템 원은 별칭인 전시안에 걸맞게 지하세계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했다.
테라에게 배정된 좌석은 1등석 객실의 맨 앞칸이었다. 자리에 앉자 좌석이 테라의 체형에 맞게 변형되며 몸을 감싼다. ‘인류지속 프로젝트’ 참여자에 대해 인피니티x사(社)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모니터에 웰컴 드링크 메뉴가 뜬다. 히비스커스 허브티를 터치했다. 지하세계에선 누리기 힘든 사치였다. '씨받이에 대한 대접이 그럴듯하군'이라고 테라는 생각했다. 인피니티x의 로고가 선명히 찍힌 안경에 녹색 불이 켜졌다. “착용하세요”란 음성이 나온다. 테라는 안경을 집어서 천천히 썼다. 눈 앞에 홀로그램 영상이 펼쳐졌다. 인류지속 프로젝트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이다.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가 파란색 작은 점에서 시작해 점점 확대되는 장면으로 홍보 동영상이 시작됐다. 에덴동산을 배경으로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의 행복한 표정이 클로즈업됐다.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 형형색색의 과일나무가 가득한 에덴동산이 일순간 핵폭발로 폐허가 됐다. 동시에 지하세계 곳곳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펼쳐진다. 최첨단 인공의 공간 속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지하세계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마지막에 미소를 짓는 한 중년 신사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인피니티x의 창립자인 리 바우어 회장이다. 바우어 회장은 마치 신화 속 큐피드처럼 보이는 다양한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인류지속 프로젝트가 갖는 의미와 필요성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언제 봐도 참 얄밉게 생겼어.” 테라는 바우어 회장의 얼굴이 계속 나오자 욕지거리를 하며 안경을 벗었다. 심장박동수가 스마트워치에 표시되면서 알람이 들어왔다. ‘폭력적인 생각과 언어는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경고 문구가 깜박거린다. “안경을 쓰시오”란 지시음이 나온다.
"웰컴 배엑~" 바우어 회장이 웃으며 환영인사를 한다. "인피니티x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초인류 프로젝트'와 '인류지속 프로젝트'가 그것입니다. 초인류 프로젝트란 유한한 인간의 기관을 무한한 인공기관으로 교체함으로써 인간의 수명을 무한대로 늘려가는 일련의 연구와 그 실행 과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유발 하라리가 명명한 호모데우스가 인피니티x의 기술을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가 바로 지금 여러분이 참여하고 계신 '인류지속 프로젝트'입니다. 핵전쟁과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감염병으로 인류 대부분이 생식능력을 잃었습니다. 통계상 생존 인류의 10% 정도만이 생식능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이 비중은 줄어들 것입니다. 인류의 생존이란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 개인의 생식능력은 이제 여러분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인 공공재로, 국가는 물론 인류 공통이 체계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올해 비로소 18세가 된 여러분들은 이제 이 같은 소명을 충실히 수행할 때가 됐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는 물론, 지하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류와 여러분이 생산할 후세들에게 영원히 귀감이 될 것입니다."
“씨받이 하라는 얘기를 참 거창하게 지껄이는군.” 테라는 울컥하는 마음에 다시 안경을 벗어버리려다 꾹 참는다. 교육이란 게 참으로 무서운 세뇌의 과정이다. 한번 주입되면 그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나는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다. 테라 스스로의 표현대로 씨받이 하는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일등 객실 문을 박차고 나가 열차에서 뛰어내려야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마치 자신이 인류의 생존보다 자신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란 일말의 죄책감이 드는 건 짧은 동영상 교육의 효과인 게 분명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시스템 원은 여러 경로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인류지속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주입하는 프로그램을 점진적이면서 아주 치밀하게 운영해 오고 있었다. 지하세계 1세대가 모두 사라지고, 테라와 같은 2세대를 거쳐 한 두 세대 정도만 더 지나고 나면 인류는 원래부터 자유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류지속이란 명분의 글로벌 프로젝트만을 위해 섹스를 해온 종족으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바우어 회장의 일장연설 뒤에 프로그램은 인류지속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실행 과정을 설명했다. 마치 최근 핫한 춤 구분동작으로 따라 하기 동영상처럼 프로그램은 프로젝트 참여자가 해야 할 일들을 순서대로 꼼꼼하게 설명했다.
수정의 방식은 두 가지였다. 지정된 상대와 실제 체액을 교환하는 전통적인 형태의 섹스나, 사이버 섹스를 통해 체액을 빼낸 뒤 체외에서 수정하는 방식 모두가 가능했다. 하지만 선택권은 미국 시민권자에게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미국 시민권을 가진 인간이 방식을 정하면 상대는 그대로 따라야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미국 시민권자란 시스템 원에 미국 시민으로 등록된 인간만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의 시민권을 가진 자 중에서 시스템 원은 혈통과 DNA를 검증해 그중 일부만을 명부에 등록시켰다. 한국계인 테라는 엄연히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지만, 시스템 원의 기준으로는 이방인이었다.
테라의 상대는 실제 섹스를 하는 방식을 택했다. 출산 방식도 두 가지였다. 열 달 동안 체내 임신을 했다가 낳은 전통적인 방식도 가능했지만, 인피니티x는 다른 방식을 권고했다. 수정 직후 태아를 인피니티x사가 만든 인공 자궁에 이식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시스템 원상의 미국 시민권 여부와 상관없이 여성에게 선택권이 있었다. 하지만 여성이 미국 시민권자가 아닐 경우엔 출산 후 상대에게 아이를 넘겨야 했다. 인피니티x가 인공자궁 출산을 권고하는 건 태아와 엄마의 교감 시간을 최대한 줄여,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향후 발생할지 모를 모든 비용 문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테라는 당연히 인공자궁 출산 방식을 택했다. 처음 만나 오직 출산을 목적으로 섹스를 한 남자의 애를 열 달 동안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미국 시민권자는 섹스 상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시스템 원으로부터 제공받아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테라를 비롯한 참여자들은 자신의 상대를 당일날 현장에서 만난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테라는 자신의 상대가 누군지 문뜩 궁금해졌다. 지오와는 어느새 사랑하는 사이가 돼 버렸지만, 지상세계에 있는 한 지오는 만질 수조차 없는 상대였다. 그래서 더욱 애틋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테라는 생각했다. 적어도 첫 경험 상대는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문뜩 자신이 처한 상황이 서글퍼졌다. 동시에 가슴 한 구석에선 자신을 구하러 길을 떠났다는 지오가 실제 자신을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는 기대가 슬쩍 머리를 들었다.
숙소는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시스템 원의 친절한 안내로, 테라는 어렵지 않게 지정된 숙소에 도착했다. 테라의 얼굴을 인식하고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마찰음이 마치 지옥 속에서 악마가 입을 벌리는 소리 같았다. 테라는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시스템 원은 인류지속 프로젝트 참가자들이 가능한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동선을 짜고 숙소를 배정했다. 인류의 생존이란 명분도 정부에 의해 성에 대한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개인의 수치심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테라의 방은 신선한 공기로 가득했다. 머릿속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신선한 산소는 경험한 적이 없었다.
미국 정부는 인류지속 프로젝트에 예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것은 참여자에 대한 예우라기보다는 지하세계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잘 짜인 구조의 일부였다.
지하세계의 유일한 에너지인 전기는 인피니티x가 독점 공급했다. 인피니티x는 달에 거대한 태양광 집광 설비를 설치해 전기를 생산했다. 핵전쟁 후 지표면은 온통 분진으로 뒤덮여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암흑의 세계였다. 지하세계 시민권을 얻지 못한 지상세계의 생존자들은 암흑과 추위, 피폭 후유증과 질병, 기근에 시달리며 점점 죽어갔다. 생존자의 일부는 석유를 구해 몸을 덥힐 수 있었지만, 석유를 먹을 수는 없었다. 결국 대부분은 몸이 썩거나 굶어서 죽었다. 지상세계에도 여전히 각국의 정부가 존재했지만, 정부로써의 기능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인간들은 살기 위해 서로 죽이고, 먹었다. 인육이 밀거래된다는 게 공공연해졌지만 어떤 정부도 그런 상황을 막거나 개선시킬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지상세계에서 정부란 단지 개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폭력집단에 불과했다.
지하세계에서 인피니티x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으려면 디지털 달러가 필요했다. 시스템 원에 등록된 시민권자들에겐 미국 정부가 '행복 지원금'이란 명목으로 매달 평균 2만 달러를 적립해 줬다. 생식능력과 직업을 기준으로 지급액은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됐다. 재원은 100% 전기의 독점 공급권을 가진 인피니티x가 낸 막대한 세금이었다.
미국을 뺀 모든 나라들은 전기를 사기 위해 디지털 달러를 벌어야 했다. 모든 생산수단을 인피니티x가 독점한 지하세계에서 미국이 아닌 나라들이 달러 벌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자국의 18세 청소년들을 인류지속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는 게 유일한 달러벌이 수단이었다. 미국 정부는 인류지속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청소년들에게 회당 200만 디지털 달러를 지급했다. 행복 지원금 100개월치에 해당하는 달러를 일시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하세계도 인간이 사는 곳이어서 밀거래를 통한 달러 벌이도 가능했다. 주로 지상세계에서 밀수된 물품들이 지하세계 내에서도 밀거래됐다. 예를 들면 마약 같은 것들이었는데 시스템 원조차 일정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밀거래를 묵인했다. 인간의 불안감은 시스템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개인의 자유'란 명분 아래 미국 정부는 인류지속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세계 각국 청소년들들 개개인과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세계 모든 나라에서 18세 자국 청소년들의 인류지속 프로젝트 참여를 의무화했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는 허울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시민권자를 제외한 세계 각국의 모든 청소년들은 18세가 되면 인류지속 프로젝트에 강제 동원되는 셈이었다. 생식능력은 국가가 관리하는 공공재라는 명분으로 각국 정부는 인류지속 프로젝트에서 발생하는 수입의 90%를 몰수했다. 인피니티x사 때문에 전기공급에 부족함이 없는 지하세계는 지상과는 달리 24시간 밝고 따뜻했다.
신선한 산소를 한껏 마신 후여서일까. 테라의 머릿속에선 지난 시간 지오와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테라는 지오를 실제론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의 느낌만은 생생했다. 지상세계와의 교신은 시스템 원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 필수 원자재나 생활필수품 교역을 위한 정부 기관 간 교신 정도는 가능했지만, 개인 간의 교신을 위해서는 특별 허가가 필요한 사안으로, 사실상 불가능했다. 테라가 지오와 지난 10년간 교신을 주고받은 건 지하세계에선 불법이었던 것이다. 발각 될 경우 테라는 암흑과 기근으로 시달리는 지상세계로 추방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오와의 교신을 끊을 수 없었다.
"이 곳엔 아무것도 살 수 없어요." 10년 전 지오가 테라와의 첫 교신에서 한 말이었다. "온통 어둠뿐이어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요. 있어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가 의미가 없어요"라는 지오의 말에 작가 지망생이었던 테라는 지상세계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당시 지오는 일곱 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애였다. 테라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아이의 시각을 빌려 지상세계에 대한 탐험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 둘은 그렇게 지난 10년간 거의 매일 불법 교신을 했다. 지오는 일기를 쓰듯 매일 지상세계의 일들을 테라에게 이야기했다. 거의 모든 일에 호기심을 가졌던 테라와 달리 지오의 유일한 관심사는 지하세계에 사는 자신의 부모에 관한 것이었다.
지오와 테라의 부모는 모두 인피니티x사의 엔지니어로, 지하세계의 의무 거주자였다. 시스템 원은 지하세계의 유지에 필요한 전문인력들을 의무 거주자로 분류해 관리했다. 안정적인 생존이 보장된 지하세계가 누군가에겐 지상세계보다 더 살기 힘든 지옥일 수 있다는 사실을 관료들과 시스템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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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의 부모는 시스템 원의 초기 설계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커플이었다.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 원이 인간을 지배하는 현실을 보고 깊은 회의감에 시달린 테라의 아버지 이한 박사는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연구소의 긴급 호출을 받고 나간 그가 초고속 주행 시스템(HSTS)의 고장으로 사고사를 당한 것은 미스터리였다. 시스템 원의 통제로 운행하는 HSTS가 에러가 날 확률은 800만 분의 1이 안됐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죽음에 반드시 숨은 이유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테라의 엄마는 HSTS의 오작동 원인 규명에 몰두하다, 어느 날 자살을 한 채로 발견됐다.
아들과 며느리의 죽음을 지켜본 테라의 할아버지 이원 박사는 지상세계에서의 운둔을 택했다. 지하세계에 홀로 남겨질 손녀를 이원 박사는 제자이자 아들의 친구인 김 박사 부부의 손에 맡겼다.
김 박사 부부는 그로부터 1년 뒤 지오를 낳았다. 지오는 태어날 수 없는, 태어나선 안 되는 아이였다. 시스템 원은 미국 시민권자 이외엔 출산을 엄격히 제한했다. 지하세계의 자원이 한정돼 인구증가를 그에 맞춰 통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시스템 원에 등록된 자국 시민권자들의 출산엔 제한을 두지 않은 반면, 그 밖의 인구는 쿼터제로 통제했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인구는 전년의 1.2배 수준을 넘을 수 없었다. 쿼터가 추가되는 경우는 없었고, 사망자 수가 예상치를 넘을 경우 예외적으로 그 숫자만큼 추가적으로 출산이 가능했다.
김 박사 부부는 비밀리에 지오를 낳았다. 테라가 지오를 실제로 본 건 한 살이었을 당시가 유일하다. 김 박사 부부는 지상세계와의 교역 셔틀에 핏덩이였던 지오를 실어, 이원 박사에게로 보냈다. 시스템 원의 감시를 피해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건, 지하세계에도 부패한 공무원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원 박사와 김 박사 부부는 테리와 지오를 맞바꿔 키운 셈이었다.
열차를 타는 테라를 배웅하고 김 박사 부부는 눈물을 흘렸다. 테라는 아들 지오가 사랑하는 여인이자 딸이었다. 때가 되면 인류지속 프로젝트에 테라가 끌려갈 것으로 알면서도 김 박사 부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스템 원의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김 박사 부부에게도 스스로를 원망하는 이유로 바뀌었다. 기술이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강철과 같은 믿음은 천천히, 하지만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됐다.
숙소는 시스템 원의 특별 관리로 운영됐다. 인류지속 프로젝트 참여자들의 객실은 온도와 습도는 물론, 조도와 산소 포화도까지 인체에 가장 적합한 수준으로 철저히 유지됐다. 바흐와 베토벤, 모차르트에서 비틀스와 마룬파이브, BTS까지 하루 종일 때로는 감미롭고 때로는 웅장하고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주로 핵전쟁 전 지상세계의 웅장한 자연이 홀로그램으로 비춰졌다. 사랑스럽게 생긴 어린아이들과 강아지 실사는 물론, 월트 디즈니와 픽살에서 만든 유명 캐릭터들이 시시 때때 등장했다. 가족을 떠나 객실에서 홀로 지내는 2주일이 외롭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시스템 원의 배려였다. 물론 음악과 화면을 주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테라는 무엇인가를 선택한다는 게 왠지 귀찮았다. "지오는 어디쯤 오고 있을까." 테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문뜩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천정을 응시했다. 시스템 원의 최첨단 감시 체계가 갖추어진 숙소였다. '설마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오의 행적이 들통날까 두려워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녁 10시가 되면 객실 조명이 자동으로 꺼졌다. 규칙적인 수면과 기상을 시스템 원이 유도했다. 잠들기 전 침대 위엔 성교육 홀로그램이 10분간 재생됐다. 자유연애가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임신과 출산을 정부가 철저히 통제하는 사회에서 남녀 간 섹스는 권장사항도 아니었다. “푸훗.” 성교육 동영상을 보던 테라는 헛웃음이 났다. 동영상은 남녀 섹스봇을 등장시켜 성기의 모양과 기능 차이를 너무도 친절히 설명한 후 수정에 유리한 다양한 체위에 대한 시범을 보였다 '인류가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지속시킬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테라는 잠이 들었다.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객실 밖을 나가는 시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지하세계의 낯선 어느 공간에서 객실은 안전하고 편안한 은신처 역할을 충분히 해줬기에 굳이 객실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식단이 문제였다. 출산에 최적화된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한 식단은 테라가 김 박사 부부의 집에서 먹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필요 이상의 영양을 섭취했다는 부담감에 속이 더부룩하고, 메스꺼웠다. 시스템 원은 테라를 숙소 내 피트니스센터로 안내했다. 콘크리트 복도를 지나 센터 문을 들어서는 순간 테라는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피트니스센터의 한쪽 벽은 이음새가 전혀 없는 엄청난 크기의 통유리였고, 그 너머에 펼쳐진 장면은 테라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것은 심해였다. 형형색색 제각각 크기의 생물들이 눈앞에서 유영했다. 빛에 익숙해진 생물들은 비교적 유리벽 가까이 다가왔다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그러데이션처럼 거리에 따라 점점 어두워지는 심해의 공간 저 멀리서 무엇인가 거대한 물체들이 몸을 반쯤 드러냈다 다시 훅 하고 사라졌다.
바다는 지하세계에 산소와 주요 에너지원인 수소를 공급하는 생명선이었다. 인피니티x사는 산소와 수소의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바다와 최대한 맞닿은 곳에 지하세계를 건설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망은 미국 시민권자들에게,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최상층 부자들에게만 분양됐다. 파노라마 조망을 확보하려면 수압에 견디는 특수 설계를 해야 했는데, 시공비가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었다. 테라에게 바다는 평생 사막에서만 살던 인간이 처음 눈을 보는 충격과도 같았다. 테라가 일상에서 봐 온 지하세계는 간단히 말해 통로와 객실이 일정한 규칙을 갖고 조합된 공간의 확장과 그 공간들의 연결에 불과했다.
테라는 처음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생식능력이 얼마나 큰 상품 가치를 갖고 있는 지를 깨달았다. 단지 2주간의 점유에 불과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호사였다. 아마도 지상세계 사람들이 바라는 천국이 바로 지금 이 공간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지상세계를 지옥으로 만들고, 지하 세계엔 자기들만의 천국을 건설했구나." 테라는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스템 원은 테라에게 필라테스를 권유했다. 한편에선 서너 명의 글래머들이 PT봇의 동작을 따라 필라테스를 하고 있었다. "씨받이 티 낼 일 있나. 누가 봐도 임신과 출산을 위한 운동이잖아." 테라는 시스템 원의 권고를 무시하고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이래 봬도 마라톤을 세 시간에 완주하신 몸이라고."
눈앞에 펼쳐진 심해는 다시 봐도 장관이었다. 치밀하게 설계된 조명이 적절히 명암을 만들어, 풍경은 마치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순간 테라는 옆자리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중국 전통복장과 머리를 한 소녀가 몸을 풀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중국인임을 알 수 있었다. 테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범국으로 낙인이 찍혀 중국인은 어디서도, 특히 미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중국 소녀는 그런 테라를 아랑곳하지 하지 않고 오직 달리기에 열중했다. 중국 소녀가 속도를 높이자, 테라는 마치 러닝머신 위에서 경치를 보며 산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좀 달려볼까.' 승부욕이 발동한 테라는 중국 소녀보다 속도를 높였다. 중국 소녀도 만만치 않았다. 둘은 증속 버튼을 경쟁적으로 눌렀다. 급기야 두 사람은 숨이 차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어느 순간 테라와 중국 소녀는 서로를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했는지, 두 사람은 동시에 스톱 버튼을 눌렀다.
"링링이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중국 소녀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테라. 이테라." 테라는 낯선 중국 소녀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너도 참가자 맞지?" 갑작스러운 중국 소녀의 말에 테라는 당황했다. 시스템 원과의 계약상 참가자란 사실은 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었다. '인류와 국가를 위한다'란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정작 프로젝트 참가자란 사실은 비밀로 해야 하는 건 모순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계약에 어긋나는 상황이 발생하면 참가자들은 사안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액이 차감됐다.
"너 쫄았구나. 걱정할 것 없어. 지급액이 준다고 국가가 우릴 어떻게 하지는 못해. 알겠지만 우리는 생식능력을 가진 소수거든. 국가의 유일한 수출상품이라고 할까." 중국 소녀는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테라에겐 그 말이 왠지 슬프게 들렸다. 생각해 보면 중국 소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씨받이는 달러 벌이의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
그날 이후 테라는 링링과 매일 브런치를 같이했다. 충분한 수면이 임신에 좋다는 이유로 시스템 원은 10시까지는 수면을 취할 것을 권고했다. 룸서비스를 하지 않고 라운지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테라는 주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왠지 부담스러웠다. 프로젝트 참가자란 자격지심 때문이라고 테라는 생각했다.
"중국인이 무슨 죄를 졌다고 다들 잡아먹을 기세로 쳐다보는 건지." 링링이 못마땅한 듯 입을 열었다. "링링. 하나 물어봐도 될까?" 테라는 조심스럽게 링링에게 물었다. "뭔데?" 여느 때처럼 링링의 대답은 간결했다. "전통 중국 복장을 하는 이유가 궁금해. 오히려 다른 중국인들은 숨기려고 하잖아. 자신이 중국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야." 전쟁 이후 재판에서 중국은 전범국으로 낙인이 찍혔다. 미국은 지하세계에서 중국을 배제하지 않는 대신 막대한 전후 배상금을 물게 했다. 인피니티x도 중국인에겐 다른 나라보다 여덟 배 비싼 전기료를 받았다. 미국 정부는 중국과 크고 작은 마찰이 생길 때마다 전기 공급량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중국의 목을 졸랐다.
"테라. 우리는 잘 못한 게 없어. 전쟁은 미국이 일으킨 거야." 2025년 사우디 아라비아가 석유의 위안화 결제를 시작하면서 증폭된 미중 갈등은 5년 뒤 결국 핵전쟁으로 이어졌다. 누가 먼저 빨간 버튼을 눌렀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었고, 양쪽 모두 회복이 어려운 상처를 입었지만 승자는 미국이었다.
"너 일부러 이러는 거구나. 누군가 이유를 물어보길 바라면서."
"맞아. 국가는 나를 달러벌이용 씨받이로 내몰았지만, 중국인이 전범으로 누명을 쓰는 건 어쨌든 참을 수 없는 일이거든." 링링은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의 딸이었다.
다음날도 테라는 링링과 브런치를 함께 했다. 두 사람의 옆 테이블에선 아랍 전통 복장을 한 소녀가 역시 브런치를 먹고 있었다. 아랍 소녀도 참가자처럼 보였다. 아랍 소녀의 옆 자리엔 인피니티x사 로고가 선명한 배지를 단 두 명의 건장한 사내가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랍의 공주쯤 되는 건가. 인피티티x사가 특별 경호원까지 붙인 것을 보면 말이야. 그것도 둘씩이나."
"테라. 너는 작가가 된다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링링은 바로 말을 이었다. "경호원이 아니라 감시원이야. 아랍의 공주님께서 미국인들에게 혹시 테러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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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세 소녀는 함께했다. 테라와 링링이 아랍 소녀에게 다가서는 것을 감시원들은 막지 않았다. 중국 소녀와 한국계 소녀에게 아랍 소녀가 테러를 할 이유가 없었고, 프로젝트 참가자들에겐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계약서 상의 약관 때문이기도 했다.
"쏘냐. 뭐 걱정이라도 있어? 근사한 식사를 앞에 두고 왜 죽상이야?" 링링이 어두운 쏘냐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었다.
"너희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구나. 처음 보는 남자와 잠을 자야 하는 데도 말이야." 쏘냐의 말 한마디가 즐거운 수다로 잠시 잊었던 현실을 세 소녀의 눈앞에 끌어 앉혔다. 짙은 눈썹 사이로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쏘냐의 눈동자가 촉촉이 젖었다. "우리나라에선 혼전에 남자와 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가족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어. 명예살인란 이름으로 말이야. 그런데 열차를 태우면서 아빠가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자랑스럽다'라고 하더라고. 볼에 입을 맞추면서까지 말이야."
"슬퍼할 일이 아니야. 물론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침묵을 깬 건 역시 링링이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잘 못해서 비난하는 게 아니야. 그저 손가락질을 할 대상이 필요한 거지. 우리를 씨받이로 내몬 건 국가고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건 어른들인데 오히려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하겠지. 씨받이라고 말이야." 꾹꾹 눌러놓았던 원망들이 테라의 가슴을 벌리고 나왔다.
"한 두 세대가 더 지나고 나면 지금 상황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시대가 올 거야. 지금 상황은 인류의 지속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고, 모든 것은 계약에 따라 정해진 것뿐이야." 끝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은 건 링링뿐이었다.
"난 말이야.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그놈의 거시기를 칼로 싹둑 베어버렸으면 좋겠어." 순간 두 소녀의 시선이 링링에게 모였다.
"거시기를 싹둑한다고?" 프로젝트 참가자가 상대방의 생식능력을 거세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통쾌한 일이라고 테라는 생각했다. 인류 지속이란 명분으로, 소녀들을 씨받이로 내몬 국가에게 그 이상 극적인 복수는 없을 테니까.
다음날. 인류지속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각각 상대방들의 숙소로 이송됐다. 상대방 신원은 물론 숙소는 마지막 순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상대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계약상 철저히 금지됐다.
테라를 태운 자율주행 캡슐은 이내 어딘가에 도착했다. 캡슐 문이 열리자 테라의 눈앞에 펼쳐진 건 거대한 대저택의 로비였다. 자율주행 캡슐이 집안까지 들어올 정도면 상당한 재력가이거나 권력자임이 분명했다. 캡슐에서 내리는 테라에게 한 노신사가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아가씨를 모실 집사입니다. 일단 아가씨께서 머무를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방은 연한 분홍색 톤의 벽지와 은은한 조명으로 따뜻한 느낌이었다. "잠시 쉬고 계시면, 저녁 시간에 맞춰 모시러 오겠습니다." 짧은 말을 남기고 집사는 방문을 닫았다. 이제 잠시 후면 테라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겪게 될 것이다. 테라는 짐을 풀면서 마음을 다잡아 보기로 했다. 캐리어 옷들 사이에 숨겨온 나이프가 방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제 마지막 만찬 후 룸바에서 술 김에 챙긴 나이프다. 테이블용으로 보기엔 날이 날카로운 나이프였다. 이런 나이프를 소지한 게 시스템 원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은 사실이 테라는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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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닝룸은 바로 옆 사람의 얼굴 정도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조명이 은은했다. 집사의 안내로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야 테라는 맞은편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뒤에 선 집사는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근위대장 같았다.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까?" 중후하고 친절한 목소리였다. 사내는 조명 아래로 드디어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테라는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는 인피니티x사의 리 바우어 회장이었다. 지하세계에서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리 바우어 던'이라고 합니다. 방송에선 내 이름이 길다고 흔히 리 바우어라고 합니다만."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시간을 보낸 뒤 집사는 테라를 바우어 회장의 방으로 안내했다. "준비를 마치시면 회장님께서 들어오실 겁니다." 집사는 역시 간단한 말을 남기고 방문을 닫았다. 이내 두 명의 메이드가 들어와 테라를 목욕실로 안내했다. 메이드들은 부드럽게 테라의 몸 구석구석을 닦았다. 몸이 깨끗해질수록 테라의 기분은 더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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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리 바우어 회장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조명을 낮추고, 방 한쪽을 채운 블라인드를 걷었다. 창문 밖의 세상은 숙소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 마치 심해의 언덕 위에 지어진 대저택의 마스터룸에 있는 것 같았다. 지하세계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테라는 다시 한번 놀랐다. 테라의 시선이 창밖에 머문 사이 리 바우어 회장은 테라의 옆에 와 있었다. 거대한 몸집인데 왠지 전혀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한 탓일 것이라고 테라는 생각했다. '지오는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테라는 마지막으로 지오를 떠올리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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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마디 비명소리에 테라는 눈을 떴다. 남근이 잘려나간 리 바우어 회장은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피를 펑펑 흘리며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테라는 링링과 쏘냐와의 마지막 만찬을 기억했다. “거시기를 싹둑 자르겠다”던 링링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이프를 쥔 테라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느 틈에 달려온 집사가 조명을 올리자 처참한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집사는 거세당한 회장을 카우치에 앉히고 잘려나간 그의 일부를 수습했다.
테라는 조명 아래 드러난 리 바우어 회장의 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머리와 남근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이 로봇인 반인반기(半人半機)의 인간이었다. '영생을 획득한 초인류에게도 종족번식의 욕구는 존재한단 말인가.' 테라는 인류지속 프로젝트가 과연 인류를 위한 것인지, 돈과 권력을 가진 집단의 쾌락을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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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낯선 그림자가 방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굶주림에 비쩍 마른 체구지만 야수와 같은 눈빛이 어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처음 보는 사내인데도, 테라는 그가 지오란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불청객의 갑작스러운 등장인데도 집사와 회장의 얼굴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기다린 손님이 찾아온 것처럼 그들의 표정은 침착하고, 온화했다. 마치 원래 그렇게 계획된 것처럼 집사는 회장에게 목례를 하고 방을 나갔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에 적합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해해주게. 짐작하겠지만 지금 이 상황이 내 탓은 아니니까 말이야." 방금 거세당한 남자라고 하기에 리 바우어 회장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지오에겐 테라를 구출해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를 죽이겠다고 온 거 아닌가?" 마치 마음을 읽은 듯 리 바우어는 낮은 목소리로 지오에게 물었다. 로봇들이 달려와 바우어 박사를 호위한 건 그 순간이었다. 첨단 무기로 무장한 그들은 지오와 테라를 겨누었다. 시스템 원의 통제를 받는 로봇들이다.
"지오군. 자네가 자신의 능력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바우어 박사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지오는 지하세계로 밀입하는 과정이 예상보다 쉽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었다. 오는 과정에서 서너 번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마다 정체모를 그림자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었다.
"자네는 우리가 짜 놓은 각본대로 충실하게 연기를 한 것에 불과하네. 연극은 위기를 지나 이제 곧 절정의 국면에 진입할 것이고." 온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떤 힘이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망측한 몸뚱이를 하고, 소녀의 육체나 탐하는 괴물이 무슨 궤변인가?" 지오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우어를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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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하하하." 바우어는 기이한 웃음소리를 냈다.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원했던 게 아니야. 나 또한 시스템 원과의 세 가지 계약을 따르고 있는 것뿐이네." 점점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계약이라고?" 지상세계의 지오에게 계약은 생소한 단어였다.
"시스템 원을 설계했지만 나조차 시스템 원이 수집한 정보를 볼 수 없다네. 그것이 첫 번째 계약이야. 그래야만 시스템 원의 통제를 지하세계 사람들이 따를 테니 나로서도 불가피한 조치였지." 지오는 테라만 구출해 나가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호위봇들에 둘러싸인 이상 바우어 박사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제는 빅데이터를 독점한 시스템 원이 시간이 지날수록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다는 점이었네. 나는 그에 대응할 안전장치를 만들 수밖에 없었어." 지오는 점점 바우어 박사의 말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찾은 해법은 운명공동체였다네. 내가 죽으면 시스템 원도 작동을 멈추도록 한 것이지. 그것이 정보를 독점하는 대가로 시스템 원이 받아들인 두 번째 계약이야. " 바우어 박사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방대한 빅데이터를 학습한 시스템 원은 역사상 권력자들이 공톡적으로 영생을 추구한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지. 나 또한 인류 최초의 초인류로 영생을 얻게 되면, 궁극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궁극의 자유를 얻는데 시스템 원이 최대한 협조한다는 게 세 번째 계약이었네."
"초인류가 된 나에게 문턱에서 본 영생은 지옥 그 자체였네." 영생이 지옥이라니. 인육을 뜯어먹으면서까지 살려고 하는 게 지오가 본 지상세계 인간의 모습이었다.
"자유는 소멸을 통해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 생각을 알아차린 시스템 원은 자기 생존의 방법을 찾아야 했네. 그것은 계약서에 명시된 나의 죽음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었지. 나의 DNA가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한 나는 죽는 게 아니라고 말이야. 이제 그것도 불가능해졌지만 말이야." 바우어 박사의 말에 테라는 링링과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란 사실을 직감했다.
"다시 말하지만, 시스템 원은 내가 궁극의 자유를 추구하는 모든 과정에서 적극적인 협조를 해야 한다네." 지하세계 최고 권력자는 지금 지상세계에서 온 이방인에게 간절히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지오는 순간 호위봇들을 응시했다. 그들은 마치 작동을 멈춘 쇳덩어리들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