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자] 언젠가부터 우리는...
- 지금과는 다른 나를 만나는 여행
그 녀석은 운동장 가장자리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 혼자서 우두커니 않아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이 있는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서 갔다. 처음엔 낯설었던 12살 시절의 내모습이 오래전의 기억과 만나며 서서히 오버랩이 되더니 결국엔 하나로 합쳐졌다. 나는 그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녀석의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안녕. 30년 전의 나에게 첫 인사를 건냈다. 그 녀석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역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만났다.
왜 친구들과 같이 축구를 하지 않는거니. 나의 기억은 30년 전의 그날로 되돌아 갔다. 주말에 축구를 가르쳐준다던 아버지는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후로 의식을 찾지 못했었다.
그냥요. 축구, 재미없잖아요. 그 녀석은 역시 거짓말에는 소질이 별로 없었다. 그 녀석은 나와 눈빛을 마주치지 못하고 땅바닥을 쳐다봤다.
그럼 혼자서 뭐하려고. 친구들은 다들 축구하는데. 친구들이 껴주지 않았나 보구나.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 녀석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 순간 축구공 하나가 그 녀석의 앞으로 굴러왔다.
우석아 공 좀. 한 친구 녀석이 그 녀석을 향해 달려오며 외쳤다. 그 녀석은 마지 못해 일어나 공을 친구를 향해 차버리고는 다시 플라타너스 나무를 등지고 우두커니 앉았다. 우석아 경묵이 집에 가봐야 한다고 빠진다고 하는데 와서 볼 차자. 축구공을 찼던 친구 녀석이 멀찌감치 서서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안한다니까. 그 녀석은 친구에게 한마디 툭 외치고는 운동장쪽을 쳐다봤다. 경묵이란 녀석이 교문쪽으로 향해 려 가고 있었다.
축구를 꼭 아부지에게 배워야 하나. 그냥 끼라 새끼야. 친구 녀셕은 한 번더 그 녀석을 설득할 요량으로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안한다고, 안한다고. 그 녀석을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벌떡 일어나 바닥에 내려놔 모레가 묻은 책가방을 툭툭 털어 휙 하지 어깨에 매고는 친구 녀석에게 멀어지는 쪽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관둬라 새끼야. 친구 녀석도 화를 내며 휙 돌아서서는 이내 멀어졌다.
나는 그 녀석의 뒤를 따라갔다. 마흔두살 어른의 발걸음은 12살 소년의 그 것을 금새 따라 잡았다.
아버지가 축구 가르켜주기로 했었나 보구나.
... 그 녀석은 말없이 어깨가 축 쳐진 채 걷기만 했다.
아저씨가 축구 가르쳐줄까. 아저씨 축구 손흥민처럼 잘 하는데.
손흥민이 누구에요. 뜻 밖의 질문이 내가 30년 전으로 되돌아 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1991년을 사는 12살 꼬마가 손흥민을 알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그냥 차범근 아저찌 처럼 축구를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형이야라고 했다.
차붐이 언제쩍 선수인데. 그 녀석은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아저씨가 축구 가르쳐줄께. 나는 그 녀석이 축구를 못해서 무리들에 끼지 못한 것으로 알았다. 힘이 좋고 운동에 소질이 있는 편이어서 조금만 가르쳐 주면 이내 어지간한 놈들은 제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축구는 이미 잘 하거든요. 축구, 그딴걸 누가 배워요. 그냥 하는거지. 뜻 밖의 대답이었다.
그럼 왜 친구들과 축구를 하지 않는거니.
말했잖아요. 축구, 재미없다고. 거짓말이었다. 나는 축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축구를 좋아한다. 30년 전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엔 흙이 묻은 축구공을 끌어안고 자다 엄마에게 혼쭐이 나고는 했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거든요.
거짓말 같은데. 아까부터 축구 하고 싶어서 계속 쳐다보는 거잖아. 운동장 쪽을 말이야. 그 녀석은 나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시시때때로 축구하는 친구 녀석들 쪽을 바라봤다.
근데 아저씨 누구세요. 왜 자꾸 저에게 말거시는 거냐구요. 저 이제 집에 가야해요. 그 녀석은 그제서야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는 우석이 네 아버지 친구란다.
아버지 친구라구요. 아버지는 친구가 없는데요. 어린 시절 아버지는 친구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대부분의 시간은 책을 읽으셨다. 아버지 친구가 집을 찾아오거나, 아버지가 친구와 술 한 잔을 하고 늦게 집에 오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어렸을 때 친구란다. 지금 너 만할 때 친구.
다행이네요. 그 녀석은 나를 흘끔 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같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땅바닥에 고정시켰다.
무엇이 다행이라는 말이니.
아버지에게 친구가 있다는 거요.
네 아버지에게 친구가 없는 것 같아 걱정했었니.
친구가 없으면 외롭잖아요. 같이 축구도 하고 라면도 먹고... 친구가 있으면 재미있는데, 아버지는 재미 없어 보이거든요. 30년 전에는 내가 아버지를 저렇게 생각했었구나. 아버지가 의식없이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장이 쓰러지고 난 뒤 어머니는 분식집을 하면서 나를 키우셨지만 장사에는 소질이 없는 분이셨다. 아버지의 입원비를 감당하는 것은 혼자 남은 어머니에겐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고, 우리는 점점 누워계신 아버지보다 눈앞에 닥친 현실을 더 많이 걱정하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악착같이 공부해서 성공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루하루 힘든 현실이 반복되면서 아버지는 어느새 원망의 대상이 돼 있었다.
우석이는 참 착한 아이구나. 아버지가 걱정되서 오늘은 친구들하고 축구할 기분도 아니었던 거니. 축구 엄청 좋아하잖아.
아뇨. 축구 엄청 하고 싶었어요.
그럼 껴서 하지 그랬어. 아까 경묵이 집에 갈 때 끼면 됐잖아.
... 그 녀석은 한동안 또 말이 없었다.
내가 축구 잘하는 거 알면 아버지가 안깨날까봐서요. 그 녀석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그렁거렸다. 언제라도 뚝뚝 떨어져 내릴 것처럼 눈물이 차오르더니 결국 그 녀석은 울음을 터뜨렸다. 30년 전 어느날 나는 아버지께 축구를 가르쳐달라고 졸랐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축구를 가장 잘 하는 아이였다. 고등학교 때 축구선수를 했었던 아버지를 쏙 빼닮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와 뭔가 같이 하고 싶어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었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주말이 오면 집앞 공터에서 축구를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다음날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