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눈이 퉁퉁 부은 이유를 알게 된 후 소년은...
"이렇게 양말을 벽에 매달아 놓으면 내가 잠든 사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가신데."
소년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세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년이 매년 양말을 벽에 걸었던 건 친구들이 부러워서였다. 크리스마스 날에 친구들은 스케이트장에 가자며 이른아침부터 초인종을 눌렀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새 스케이트를 받았던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런 소년을 보며 "몇 살인데 아직도 산타클로스 타령"이냐고 나무랐다.
다음날 아침 소년은 비어 있는 양말을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몰라 이부자리 쪽을 확인했다. 양말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크 선물이어서 머리맡에 선물이 놓여있을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마저 물거품 처럼 사라질 뿐이었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엄마는 일찍부터 아침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약수터에 약수물을 뜨러 나가면서 새벽녁에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아침잠이 많은 소년의 여동생만이 깊은잠에서 아직 깨기 전이었다. 여동생은 소년보다 두 살이 어렸지만 벌써 수년전부터 양말을 벽에 걸지 않았다. 산타클로스는 지어진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음부터는 양말을 거는 게 유치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더이상 빈양말을 보고 실망하는 게 싫기도 했다.
아침 밥상은 여섯식구가 한꺼번에 모여서 밥을 먹기엔 너무 작아서 젓가락질을 하는 동안 서로 팔뚝이 부딛히고는 했다.
소년은 양말이 빈 것에 실망해서인지 화가나서인지 아니면 김치찌게 국물에 말아놓은 밥을 한숟갈 크게 떠 입에 넣어서인지 입이 뾰루퉁 삐죽 나와 있었다.
"6학년이면 너도 이제 어른이야. 장남이란 놈이..."
소년의 아버지는 밥상 분위기가 무거운게 싫었는지 소년을 나무라며 혀끝을 찼다. 소년은 아버지가 무서워서 말한마디 못하고 나온 입을 오무렸다.
"근데 아버지 눈이 왜 이렇게 부었어요? 벌레에 물린 거 아니에요."
소년은 큰 누나의 말에 아버지 얼굴을 바라봤다. 실제 아버지 눈은 마치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부어있었다. 엄마는 비어있는 김통을 보고 말이 없이 구운김을 가위로 잘라 김통을 채웠다. 크리스마스 아침이어서인지 엄마는 김을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많이 구웠나보다.
"벌레는 무슨. 쓸데 없는 얘기 말고, 밥이나 어서 먹어라."
무뚝뚝한 성격의 아버지는 큰누나의 말에 짜증이 역정을 냈다. 여섯식구는 아침밥을 다 먹을 때까지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탐스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누나들은 각자 건너방으로 돌아갔다. 대형건설사에 다녔던 삼촌이 이라크 현장 파견생황을 마치고 돌아오며 갖고 들어온 내쇼날 라디오 소리가 문틈 사이로 나왔다.
초인종 소리에 대문쪽으로 나갔던 엄마가 소년을 불렀다. 앞집사는 소년의 친구는 또 새 스케이트를 목에 매고 와서는 소년을 불렀다. 친구의 아버지는 매년 새 스케이트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었다. 해바다 발이 커서 전년에 산 스케이트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구는 매번 크리스마스 때마다 새 스케이트를 타고, 그의 한살 터울 동생이 번번히 형의 스케이트를 물려 받았다. 동생은 헌 스케이트를 물려받는게 싫다며 투덜거렸다. 소년은 그 동생이 부러웠다.
소년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썰매를 들고 친구를 따라 나섰다. 당시 스케이트장이란 건 추수를 끝낸 논에 물을 채워 얼린 수준이었다.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은 동네에선 제법 부자 소리를 듣는 집안의 자녀들이었다.
스케이트장에 도착한 소년의 친구는 검은 스케이트 주머니에서 새 스케이트를 꺼내 들고는 "독일제 스케이트야. 아빠가 쇠로 만드는 건 무엇이든 독일제가 최고라셨어. 스케이트는 칼날이 중요하거든"이라며 수입제품이라는 걸 노골적으로 자랑했다. 친구와 그의 동생은 자리를 맡고 앉아서 스케이트를 신고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트랙은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다. 썰매를 갖고 온 아이들은 스케이트장 구석에서 설매를 제쳤다. 그들은 썰매위에 앉은뱅이처럼 앉아서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을 올려다 봤다. 햇빛이 눈부셔서 소년은 눈물이 났다.
***
다음날 아침 소년은 아침을 먹고 대문을 나섰다. 전날 내린 함박눈이 쌓여 걸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 대문 밖에선 소년의 아버지가 싸리비로 눈을 치우고 계셨다.
"회사 안가셨어요?"
보통 아버지는 소년이 일어나기 전에 아침을 먹고 출근을 했었다. 때문에 등교길에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건 소년에겐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어서 학교 갔다 오너라. 길이 미끄러우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이 멀어지는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눈을 마저 치웠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소년은 등교길에 나서며 아버지에게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고 인사를 했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는 이제 그런 상황이 익숙해져서 소년은 그 시간에 아버지가 집에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
한달쯤 시간이 지난 어느날 소년은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와서 건너방에서 나오는 한 군인 아저씨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큰누나는 성격이 민감한 편이어서 자신의 방에 누가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소년이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흔적이라도 있으면 큰누나는 소년이 머릿채를 잡고 소리를 지르고는 했다. 그런 큰누나의 방에서 건장한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것이었다.
"인사해라. 오늘부터 우리집에서 같이 살게된 아저씨야."
소년이 들어오는 소리에 부엌에서 나온 엄마는 소년에게 군인아저씨를 소개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버지가 해고를 당했다는 사실과, 살림값을 벌기 위해 엄마가 큰누나가 쓰던 방한칸을 인근 공군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에게 세를 놓았다는 사실을 소년은 그제서야 알게됐다.
그날밤 자신의 방이 없어진 사실을 참을 수 없었던 큰누나는 엄마에게 대들다,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는 밤새도록 펑펑 울었다. 다음날 아침 큰누나는 눈이 퉁퉁 부어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마사지를 하고는 대문을 나섰다. 그날 아침에도 아버지는 벌레에 물렸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
"공주야 이제 일어나야지. 크리스마스인데 잠으로 좋은 시간을 날려보낼꺼야."
사내는 아침밥을 가족 모두가 같이 먹기 위해 딸을 깨우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딸이 정확히 열네살이 되는 날 아침이었다. 전날 사내는 가족들과 집 근처 레스토랑에서 캐롤을 들으며 간단히 와인 한잔을 했었다. 딸은 전날밤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를 정주행하느라 거의 밤을 새웠나보다.
눈을 부비고 일어나는 딸은 머리맡에 놓인 선물 상자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스케이트구나."
사내의 딸은 한달전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스케이트를 받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다. 한 방송에서 피겨 여왕 김연아의 일대기를 담은 특집 방송을 보더니 스케이트를 배워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초록색 리본으로 묶은 흰색 선물상자가 그 날이 크리스마스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스케이트 맘에 들어?"
딸의 방에서 나오는 사내와 딸아이를 보며 엄마는 식탁에 젓가락을 놓고 있었다. 전날 성찬을 한 이후여서 크리스마스 아침 메뉴는 간단히 메운맛 진라면이었다. 눈을 부비고 앉은 딸은 대답대신 고개글 끄덕였다.
"김연아 언니 스케이트와 같은 회사에서 만든거야."
"알아. 이거 무지 비쌀텐데."
딸은 인터넷으로 김연아 언니의 스케이트에 대해 나름 정보를 찾아본 모양이었다. 방에서 상자를 열고 스케이트를 꺼내자마자 딸은 사내에게도 같은 말을 했었다. 김연아의 스케이트는 캐나다의 유명한 업체에서 만드는 명품 스케이트였다. 수제작으로 만들어 값이 여느 스케이트보다 몇배는 더 비쌌다. 와이프는 딸의 발 모양과 수치를 꼼꼼히 재서 캐나다 본사로 보냈었고, 크리스마스 전에 다행이 스케이트를 받았다고 좋아했었다.
아침을 먹고 사내는 커피를 마시며 가족들과 넷플릭스 영화를 한편 봤다. 크리스마스 영화의 단골메뉴여서 이미 여러번 본 '나홀로 집에'란 제목의 영화다. 그날은 생일인 딸이 주인공이었고, 그녀는 열네살이 되도록 아직 한번도 나홀로 집에를 본 적이 없었다.
창 밖엔 그날도 함박눈이 탐스럽게 내렸다. 사내는 소년 시절 크리스마스 이브에 벽에 걸었던 빨간 양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양말 때문에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을 아버지를 생각했다.
엄마는 농에서 요와 이불들을 꺼내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tv앞에 놓인 앉은뱅이 책상에서 책을 읽다 엄마가 이부자리 펴는 것을 보고 챙상을 접었다. 당시 우리는 15평 남짓 되는 넓이의 낡은 기와집에서 여섯 식구가 살았다. 누나 둘이 건너바 한 칸을 쓰고, 남은 건너방 하나는 인근 공군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 아저씨에게 월세를 내줬었다. 안방은 제법 긴 편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이라 실제 넓이보다 훨씬 더 넓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