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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익 Jun 06. 2021

[시간여행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 '아름다운 추억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창문 너머 그녀가 보였다. 약속 시간보다 빨리 온다고 서둘렀는데 그녀가 먼저 와 있을 줄몰랐다. 그녀는 적어도 약속시간보다 30분 이상 먼저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1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16년 전의 나에게 이별을 고했었다. 당시 나는 수습 기간이어서 새벽부터 그다음날 새벽까지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내가 자신에게 관심이 세심하지 못했던 것으로 오해했었다.


김하영씨 맞으시죠. 그녀는 낯선 남자의 출현을 경계했다. 낯을 무척이나 가리는 성격이었다. 그날로 시간여행을 떠나기 전 그 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녀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석이 사촌형입니다. 우석이가 사정이 생겨서 오늘 약속 장소에 나올 수 없다고 전해주러 왔습니다. 내 말을 듣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커피 한잔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그녀는 삐삐를 확인했다. 아마도 내가 연락을 취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워낙 급한 일이어서 연락조차 못했을 꺼에요.  


무슨 일이 있는건가요. 칠흙같은 단발머리에 검은 눈동자, 블랙 체스터필드 코트가 참 잘어울렸다. 조인트 동문회 신입생 환영회 때 나는 뒤늦게 후배들 술값 내주러 갔다,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었다. 당시 졸업반이었던 나는 그녀와 섯살 차이가 났다. 연한 핑크색 후드티에 연노랑 야구모자가 참 잘어울리는 신입생이었다.


우석이 누나가 새벽에 차례지내러 내려오다 빙판길에 사고가 났어요. 충남대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는데 아직 의식을 못찾고 있어서...


잔경이 언니가요. 의식을 못찾을 정도면 사고가 컸나봐요. 괜찮은 건가요. 하영이는 진경이 누나와 한번 만난적이 있었다. 국립극장에서 하는 오페라 티켓이 생겨서 같이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빙판에 미끌어져 축대밑으로 차가 굴렀는데 진경이가 아이를 가진 상태여서 안전벨트를 안매고 있었나 봐요. 운전했던 우석이 매형은 괜찮은데 진경이가 차에서 튕겨 나갔던 모양입니다. 우석이가 많이 놀랐을 꺼에요. 경이 누나라면 워낙 애틋한 녀석이라. 열두살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후 어머니는 분식집을 하느라 새벽같이 나가서 열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사춘기 소년에게 엄마 역할을 해준 건 경이 누나였다.


실례지만 핸드폰 좀 빌려주시겠어요. 충대병원에 삼촌이 근무하세요. 아무래도 얘기를 해놓으면 좀더 신경을 써주실 꺼에요.


나는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냈다. 그리고 통화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날 경이 누나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고, 내가 병원에 달려가느라 약속 장소에 나갔더라면 우리는 다시 사귈 수 있었을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헤어지고 1년여가 지나 구정연휴를 앞두고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열차표를 동생 것과 함게 두장씩 끊었는데 동생이 사정이 생겨 표가 남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려가는 건 차편이 있어 올라올 때 같이 올라오자고 했었다.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1년 만에 연락할 구실치고는 빈약했지만, 오히려 그 것이 나에게 실낱같은 기대감을 갖게 했었다. 막연한 기대가 확신으로 바뀐 건 그녀의 두 번째 연락 때문이었다. 그녀는 구정 당일 차례를 지내고 별일이 없으면 차표를 건내줘야 하니 대전역 대합실 내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었던 것이다. 그녀가 산 차표는 구정 다음날 대전발 서울행 무궁화호였다.


삼촌이 알아보신다고 하네요. 임신을 하고 있다면 CT 찍을 때 조심해야 해서 각별히 당부를 해놓겠다고 하셨어요. 그녀다운 행동이었다. 그녀는 남자인 나보다 훨씬 냉철하고 담대한 성격이었다.


합니다. 마침 삼촌이 병원에 계신다니 다행이네요. 우석이에게도 연락해 놓겠습니다. 아 우석이 삐삐를 한번 쳐볼까요. 아무래도 직접 통화를 하시는 게...


아니에요. 오빠도 정신이 없을텐데, 나중에 제가 연락할께요.


그러시겠어요. 혹시 오늘 우석이를 보자고 한 용건이 있으세요. 저녁에 통화하기로 했는데 그 때 전해드리겠습니다.


특별한 일은 없어요. 그냥 기차표를 전해줘야 해서...  


아 그러셨군요. 내일 만나서 올라가기로 했다고 하던데... 나는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내게 다시 만나자는 얘기를 하려고 했었던 것일까.


오빠가 그런 얘기까지 하던가요.


그게 아니라, 병원으로 가면서 내일 올라갈 수 있을 지 생각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랬군요. 아무래도 내일 오빠가 나오긴 힘들겠죠. 경이 누나가 의식을 차린 건 충대 병원으로 실려오고 이틀이  지나서였다. 결국 나는 그 다음날도 대전역에 나가지 못했다. 병원에서 밤을 꼬박 세우고, 다음날 집에 돌아와 곯아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인연이란 게 참으로 얄궂다. 그날 누나가 새벽길에 사고만 나지 않았더라면, 그게 아니도 하루만 빨리 의식을 차렸더라면, 그래서 내가 명절 다음날 그녀와 대전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나란히 앉아 두시간을 보냈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내가 방송국 PD 시험에 연이어 떨어지고, 원치 않았던 기자생활을 하느라 힘들어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토록 매몰차게 나를 밀어내지만 않더라면 나는 그 이후라도 그녀에게 달려갔었을까. 그녀 자존심에 아마 내게 연락하기까지 수만번은 망설였을텐데... 그만큼 그녀도 내게 미련이 남았었던 것일까.


나는 그녀와 카페를 나와 대합실을 가로질러 걸었다. 대합실 끝은 대전역 광장으로 내려가는 긴 계단으로 이어졌다.


서울에 올라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네, 아직은 시간이 있어서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네. 그럼 잘 올라가세요.


괜찮으시겠어요. 그녀는 어떤 이유에선 지 계단을 잘 내려가지 못한다.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과 다투다 귀를 다쳐서 그렇다고만 했었다.  


뭐가요.


나는 그녀에게 하마터면 손을 내밀 뻔 했다. 데이트를 할 때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면 우리는 손을 잡았었다. 대부분은 검지 손가락을 서로 걸고 내려갔다.


아닙니다. 그럼 안녕히 들어가세요. 나는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젠 적어도 내가 그날 약속에 못나간 이유를 그녀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자신을 얼마나 그리워햇는지도 알았으면 좋겠다. 그녀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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