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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음 Dec 07. 2021

만화책을 허락한다

만화책만 읽으려는 아이에게


‘오늘은 5권만 빌리는 거다. 만화책만 보면 안 되는 거야.’ 어느 날 도서관에 가서 큰 딸아이에게 말했다. 7살 때부터 간간히 학습만화를 봤지만 너무 만화책만 찾아서 안 되겠다 싶었다. 만화책만 보고 있는 딸에게 ‘너 자꾸 만화책만 볼래? 이번에 도서관 가면 만화책 못 빌리게 한다.’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만화책만 보고 있는 모습이 신경이 쓰였다. 줄글이 있는 동화나 그림책에 관심을 놓아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대화 형태의 글만 읽으면 긴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다고 하던데 우리 아이가 그러면 어쩌지 싶다. 거기다 아는 언니의 말이 한몫 더했다. ‘만화책은 아예 보여 주는 거 아니야. 어차피 만화책으로 나온 내용들이 일반 책으로 다 있는데 왜 만화책을 보여줘. 우리 애들은 시작도 못하게 했어.’ 너무 빨리 만화책을 허용해준 것일까? 이제 만화책만 찾고 다른 책은 안 보면 어쩌지?



글자를 알고 책을 스스로 읽는 모습이 너무 기특했었다. 이것저것 책을 찾아 읽고, 만화책까지 보는 모습 자체가 예뻐 보였다. 처음에는 TV 만화 신비아파트, 숲의요정 페어리루 같은 것들의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글자를 혼자 읽으려 책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학습적인 만화로 보여줘 볼까 싶어 한국사 시리즈 만화를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웬일인가. 단숨에 읽어 내려가며 역사에도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엄마보다 역사를 더 많이 알 것 같다는 기대가 될 정도로 역사 관련 학습만화에 빠졌다. 이렇게 학습만화를 시작했다. 직접 손에 쥐어주기도 했던 만화인데 이제는 아이가 너무 볼까 걱정을 하고 있다니...


 


학창 시절 곳곳에 도서대여점이 있었다. 만화책과 추리소설 그리고 비디오 등을 일정 돈을 주고 대여해주는 곳이었다. 그 당시 대여점들은 인기가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하교 후, 퇴근 후 만화책을 빌려 낄낄거리며 봤었다. 이 때야 말로 만화책의 전성시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나 역시 원수연 작가의 <풀하우스>를 시작하여 <슬램덩크>, <원피스>, <명탐정코난> 등 만화책을 열심히 봤다. 다음 내용이 미치도록 궁금해 여러 도서대여점을 이용하여 다음 권을 빌리기도 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책을 읽었던 시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만화에 대한 열정, 즉 책을 읽던 좋은 추억 때문에 지금 독서를 좋아하고 있지 않나 싶다. 지금은 만화책을 보지 않는다. 일부러 보지 않는 것은 아니고 어느 순간 흥미를 잃어버렸다. 여동생의 경우 만화를 너무 좋아해 실제 어떤 만화책은 전집을 모두 소장하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 책을 많이 읽는 편이지만 만화책을 찾아서 읽지는 않는다. 만화책을 본 시절은 인생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한 때였다.



만화책도 엄연히 책이고 작품인데 아이에게 만화책을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만화책을 열정적으로 본다고 다른 책들을 보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만화로 된 책만 읽다 보면 긴 글 지문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 자꾸 만화를 못 보게 하려는 마음은 책 읽기를 성적과 연관시켜서라는 생각이 든다. 독서 자체로만 바라보면 만화를 못 보게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만화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다른 책도 즐겨 읽을 줄 안다. 여러 장르의 많은 책들을 접하는 과정이다. 만화책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요즘은 학습만화도 배경 지식을 쌓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책들이 많다. 내가 봐도 도움이 되는 책들이 꽤 있다 학교에서도 보면 줄글이 많은 책을 선호하시는 선생님들도 있지만 만화의 질이 상당히 높아졌다며 읽기를 권장하기도 한다. 지금 큰 딸아이는 만화책을 꽤 즐겨본다. 하지만 줄글이 긴 동화책이나 그림책도 모두 읽는다. 우연히 친구네 집에서 그리스로마신화 만화책을 읽게 된 적이 있다. 신화 이야기가 꽤 흥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스로마신화를 만화책으로 다 읽고, 그림책으로 나온 올림푸스 가디언 그리스로마신화 60권 전권도 며칠 만에 읽어버렸다.


사실 이때 만화책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만화책을 본다고 만화책만 보지 않는구나. 그때부터는 만화책의 허용범위가 넓어졌다. 특히 도서관에서 빌리는 만화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허락했다. 한자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마법천자문을 읽었고, 수학도둑 80여 권을 2달여 만에 읽어버리기도 했다. 속담이나 고사성어도 만화책으로 익혔다. 그렇게 나도 아이도 만화와 친숙해졌다. 만화는 아이들에게 저급한 책이나 배척해야 할 문화가 아니다. 싸구려 콘텐츠는 더욱 아니다. 요즘은 온라인에서 연재하는 만화의 경우만 봐도 남녀노소 좋아하는 문화적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원작을 만화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해외로 수출 하기도 한다. 만화책을 읽으면 단지 읽기 지문을 못 이해할 거 같아서 나중에 긴 책은 안 읽을 것 같아서 라는 편견 때문에 아이들에게 만화를 못 보게 하는 것은 독서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내가 만화를 좋아했을 때를 생각하면 만화책 금지는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책을 읽으며 이야기에서 전해지는 짜릿한 전율을 오롯이 느껴보면 좋겠다. 다음 내용이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 꿈에 나오고, 밤새 봐도 또 보고 싶은 강력한 책의 힘을 경험해보면 좋겠다. 책에 대한 재미를 알고 흥미를 읽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만화책을 보고 어떤 것이라도 머릿속에 지식이 쌓아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인생을 길게 두고 보면 이렇게 만화책 읽을 날도 기껏해야 몇 개월, 몇 년이다. 얼마 전 80권 끝내버린 딸아이에게 나는 또 다른 만화책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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