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을 하다가 지루해져버린

by 정민희





매일 같이 드로잉을 한다. 8월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었으니 이제 겨우 100일도 되지 않은 거다. 장수는 100장 정도 그렸다. 근데 벌써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리고 싶었다더니 벌써 지루해진다고? 그게 말이 돼? 된다. 아무리 하고 싶은 것도 시간적 여유가 많아지고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니 청개구리 심보가 올라온다. 그렇다고 안 그리는 건 아닌데 가끔 지루하다. 이걸 평생을 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얘기해본다. 웃기게도 이럴 땐 회사에서 일하던 때를 떠올린다. 그럼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 순간이 다시 행복해진다.

봐 지금 10시지? 지금 회사라면 이제 출근해서 커피를 내리고 노트북을 켰어. 이제부터 길고 긴 하루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지금 나는 이미 하루를 시작한 지 한참 전이야. 스스로의 의지로 일찍 일어났고 정신이 깨고 싶어서가 아닌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커피를 내려 마셨지. 매일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쓰지 못한 아침 일기를 썼고 오전에 산책도 했어. 글도 조금 끄적이다가 본격적으로 드로잉을 하고자 공책을 폈어. 여기까지 생각하면 벌써 너무 행복하다.


회사생활의 경험은 끔찍했지만 지금의 내 시간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줬다. 맞아. 지금 이 시간이 내가 그토록 바랬던 시간들이었지. 어떻게 다시 찾은 시간인데. 제대로 누리자. 지루해하지 말자.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는 것은 똑같은데 그 안에서 굴러가는 자잘한 것들을 내가 설정할 수 있다는 게 좋다.

막상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이미 나는 신이 나 있다. 그리고 매일 그림을 고민하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진다. 요즘은 산책을 하며 담게 되는 풍경들을 그리는 중인데 매일 산책하는 장소가 같다 보니 패턴이 자꾸 비슷해진다. 오늘은 다른 동네를 걸어볼까? 산책을 하면서도 이 장면이 그림으로 옮겨지면 어떻게 표현될지에 대한 생각들 한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하루 종일 어떻게 그릴지에 대한 고민만 한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매일이 행복하다. 그런데 지루하다니!! 꽤나 행복한 일상이네.

지루해하기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다. 머릿속 이미지와 손끝으로 나오는 이미지가 일치하려면 아직 멀었다. 지루하다는 배부른 소리를 하면서 계속 하자. 맞아. 이게 내가 바랬던 온전한 하루지. 지루한 드로잉을 매일 하는 일상. 왜 하는지 몰라도 지루해도 그냥 계속 그리자. 별거 아닌 것 같이 보이는 지금의 온전한 행복을 마음껏 누릴 거야.






이전 08화만들어진 이유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