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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ug 07. 2022

과거 회귀의 강력한 유혹

지그문트 바우만 《레트로토피아》


선과 악이 확실하고 동과 서가 분명했던 지난 세기, 과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구 냉전 시절, 사람들이 꿈꾸던 미래는 원월드, 세계화, 모두가 모두와 자유로이 교류하는 사해 시민의 유토피아였다. 인터넷 디지털이 미래를 현재로 바꾼 지금, 사람들은 누린 자유만큼이나 방향을 잃고 목표를 상실한 채 스스로가 스스로를 알아서 책임져야 하는 파편화된 개인들이 되었고, 힘을 잃은 국가는 그 책임을 더욱 개인에게 돌리게 되었다.


르네상스인 토마스 무어가 작명했다는 '유토피아'는 풀이하자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유명한 말 "이 땅에 낙원을 약속하는 자들이 지옥문을 연다"가 당연한 것은 없는 걸 있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시인 오스카 와일드는 "풍요의 땅을 찾아 항해를 떠난 선원들은 도착하자마자 다시 수평선을 향해 돛을 올려야 한다"라고 했다. 풍요의 땅을 풍요로 채우고 있는 것은 모순과 모호로 가득한 현실임을 깨달은 자들은 본능처럼 다시 바다를 그리워하게 된다. 확실함을 모호함으로, 평생 희망을 이생 폭망으로 치환당한 개인들의 불만은 세대가 세대를 탓하거나 반쪽이 반쪽을 대적하는 내부 총질의 지경에 이르렀다. 옳다구나, 권력은 잽싸게 이를 이이제이의 수단으로 삼았다.


유토피아(=미래)에서 디스토피아(=현재)로의 흐름은 헤겔의 삼단논법에 의해 레트로토피아(=과거)로 향한다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유작에서 경고하고 있다. 불안정한 현재를 구원해야 할 미래가 더 이상 제 역할을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반대로 과거를 꿈꾸게 되었다. 문명과 이념과 시스템의 최선을 보았노라 철석같이 믿어왔던 만큼 반대급부로 노스탤지어(=향수)에 빠져버리고 거대한 역사의 쳇바퀴 안으로 퇴행적 시간이동을 하게 된다. 온갖 엑시트로 출구만 뚫린 유럽연합이나, 아메리카 퍼스트 또는 일대일로를 외치며 신 냉전 시대를 부추기는 G2에 의해 힘을 잃고 명분마저 위태로운 국제기구를 보면, 레트로토피아는 이미 우리 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벨 에포크. 찬란한 옛 시절. 하지만 그 아름다웠던 시절의 사람들 역시 그보다 더 과거의 리즈시절을 동경하고 있더라는 아픈 진실을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은 뼈저리게 느꼈다. 판타지는 뫼비우스의 개미지옥이 되었다. 레트로가 뉴트로가 되고, 싹쓰리가 싹쓸이하는, 현실의 히어로를 잃은 새로운 신화의 시대. 우리 스스로가 어벤저스가 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약물 파이프를 꽂고 누워 숨만 쉬어도 플레이어 원의 활극이 가능한 가상세계의 매트릭스에 남들보다 먼저 적응하는 게 위너의 길인 건 아닐까? "디지털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확실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자초했다는 사실이다.


#레트로토피아 #지그문트바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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