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글을 읽고 그 사람처럼 쓰고 싶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별로 가능성 없는생각이었습니다. 나는 나를 잘 아니까요. 직감 대신 지각에 지배받고간결하기보다 장황한 천성이 어찌 쉬이 바뀌겠습니까. 촬영 직전 푸시업으로 급히 펌핑하는 보디빌더처럼, 오죽하면 글을 읽은 직후에 자판을 두들기면 비스무리 하게라도 되지 않을까 되지 않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신기한 건, 작가의 마지막 책을 우연히 읽기 전까지 작가에 대해서 전혀 들은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름도 짧고, 나이도 많고, 가치도 닮았는데 왜 진작에 몰랐을까요? 아, 세 번째 표현은 틀렸습니다. 가치는 그다지 닮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선도 태도도 글투도 사실 하나도 안 닮았습니다. 그래서, 단번에 끌렸습니다. 시작은 그림동화 작가였다는데 나는 죽기 전 썼다는 에세이부터 읽어서 동화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암으로 죽었다는 것 외에 딱히 더 알아보지도 않았습니다.더 찾아내지 않았다고 아쉬울 건 없습니다. 이 투덜이 할머니의럭비공 같은 첫인상이 덜해질까저어할 뿐입니다. 초창기 동화 같은 건 뒀다 나중에 (내키면) 찾아보렵니다.
《죽는 게 뭐라고》, 《사는 게 뭐라고》, 메멘토처럼 뒷작품부터 읽기 시작해서 이 책까지 왔습니다. 작가의 이름은 사노 요코입니다. 작가의 글은 뭐랄까.. 튑니다. 스카이콩콩처럼 통통 천진하게 튀는 게 아니라머리털 세운 털스웨터정전기처럼 지직 까칠하게 튑니다. 순간적인 전하의 도약이 가시풀처럼 살짝 따갑긴 한데어느새찰싹 달라붙는 벨크로가 되어솜털을 타고 흐르다 공기 중으로 흩어집니다. 붙을 때 찍, 사정없이 붙었다가도 떨어질 때 찍, 뒤끝 없이 떨어집니다.
이 책도 그런 찍찍이 같은 책입니다. 남녀공학 (다녀본 적 없습니다만) 교환일기 (써 본 적은 있습니다) 스타일로 서로 글투가 다른 두 사람이 번갈아 티키타카를 주고받는 짧은 연작소설. 교환일기의 주인공이 사춘기 소년 소녀가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인 게 함정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뭐 어떻습니까? 할아버지의 이름 역시 처음 들었지만서도 사노 요코의 이름만으로도 흥미로웠던 《두 개의 여름》이었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겐타로가 말한 '우주'란 뭘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깜깜한 곳인 것 같습니다. ( ... ) 밤에 잘 때,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우주 알아?" "그게 뭐냐, 얼른 자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 ... )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