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수레바퀴 속 운명을 뛰어넘는 위인들의 얽히고설킨 무용담이 퉁구스 초원을 뒤덮는 도도함으로 위압하는 대하소설은 아니다. 그저 한 촌로의 넋두리에 장단 맞춰 개뼈다귀 같은 시대상을 따라가다 보면 이름 없고 힘없는 시대의 주변인들이 어찌 그리도 이름 없이 살다 힘없이 죽어나갔는지 담담히 목격될 뿐이다. 쉬이 읽은 그 짧은 동안에도 아파트 앞 택배 상하차 들었다 나는 소리는 수도 없이 들렸다 사라졌다.
삼국지, 서유기 따위 고전 중의 고전을 제하곤 읽어봤다는 중국소설이래 봐야 펄 벅의 《대지》랄까 에이미 탠의 《조이 럭 클럽》이랄까 -그나마 순수 중국인 작가가 아니라신다면 류츠신의 《삼체》는 어떠실지- 몇 개 있는 둥 마는 둥한 수준이다. 그런데, 어째 요즈음 우연찮게 읽은 몇 개 작품이 해마에 제법 스크래치를 내었다.
루쉰의 《아Q정전》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流)》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
각각
청말 정신승리 시정잡배
국공내전 후 대만 근대사
미국 이민 2세의 환상문학
다른 작품인데,
우리의 《토지》가, 《태백산맥》이 게서 끝나지 않듯이
시대와 장소가 달라 보여도 갈라칠 수 없고,
하나의 괄호로 담아내기도 불가능한,
끝없이 0으로 수렴하지만 절대 0은 되지 않는,
무한소를 해로 가진 이상한 도함수의 그래프가
자꾸만 송과선을 흔들어 놓았다.
인간은 왜 이리 잔혹한가.
인간은 왜 이리 얄팍한가.
인간은 왜 이리 아둔한가.
소설의 원제는 《활착(活着)》이다. 옮겨 심은 식물이 새 땅에서 고사하지 않고 뿌리를 내려 생장하는 것을 뜻한다 한다.
역사라는 뻔한 땅을 매번 되밟으면서
이번만큼은 맴돌지 않노라 스스로를 속이는
그 어리석은 희망이야말로
인생을 활착시켜 온 힘인 듯하여
주저함도 주저앉음도 없이
뒷걸음질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발짝을 떼라
책장을 덮으며 당부하였다.
#인생 #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