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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Mar 05. 2023

파인만 씨, 놀기도 잘하셨네

천재는 못 말려


R.P.파인만은 봉고 연주자이자 문자 해독자였고 금고 따기 선수였으며 아마추어 화가였다. 낙타와 순록이 공존하고 동시에 두 가지 소리가 중첩하는 '흐미'의 나라 투바 공화국을 동경하는 -끝내 가보지 못했다- 여행가이기도 했다. 아, 참고로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을 연결한 양자전기역학(전자기장의 양자화. 매우 대충 퉁치자면 빛과 물질의 상호작용)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이기도 하다. 화살표 작대기 몇을 그은 그림 '파인만 도형'은 어려운 계산을 직관적으로 시각화하는 툴이 되었다.




리처드 파인만은 평생을 호기심과 재미를 추구/충족하며 살았다. 그의 관심을 끈 건 머리를 써서 풀어볼 수 있는 다양한 새로운 것들이었다. 그의 동료 프리먼 다이슨(드라이어 아니고 스피어의 다이슨)은 파인만을 “몽땅 천재고 몽땅 얼간이”라고 평했다. 이걸 올 오어 낫띵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양 극단의 중첩으로 봐야 하나. 한 서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서명을 남겼다. "위원 파인만, 노벨상 수상, 아인슈타인상 수상, 외스테드 메달 수상, 그리고 정치는 문외한."




“나는 적극적으로 무책임하다.”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이었던 파인만은 히로시마 원폭의 성공적 투하를 자축하는 파티에서 드럼 연주를 즐겼다. 과학자는 연구할 뿐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윤리문제는 다른 이들이 고민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은 본인의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


"저는 로스알라모스에서 ‘적극적 무책임’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산책을 했는데, 어느 날은 위대한 수학자인 폰 노이만 박사님이 이러시더군요. “저는 사회 문제는 뭐든 아무 책임감을 안 느낍니다. 제가 왜 그걸 느껴야 합니까?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 이 세상을 만든 게 아니거든요.” 그때 그건 저에게 참신한 개념이어서 얼른 받아들였죠. 세상에는 책임감 타령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으니 적극적으로 무책임해지기는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파인만은 책임지지 않는 행동에 오히려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무책임하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과학으로 밝힐 수 없는 모호한 관념의 영역에 그는 무관심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물리학 연구였고 명확히 파악되는 삶의 즐거움집중했다.


"누가 대학 행정을 맡아달라고 하면 “안 합니다. 저는 무책임하거든요. 저는 학생들은 신경 안 씁니다.”는 입장입니다. 저는 물리학을 좋아하니까 물리학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기적이거든요."




“집사람이 하라고 해서 말이야.” 



‘사회적 무책임의 원칙’ 소유자인 파인만이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참사의 진상규명을 맡은 사건은 인상적이다. 이유를 묻는 친구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집사람이 하라고 해서 말이야.”

NASA의 의사결정과정에 깔린 정치적 요소들을 설명해 주려는 관계자에게 파인만은 말했다. “저는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을 품고 살고 싶지 않습니다. 들은 말은 뭐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입도 뻥긋하지 마세요.”

TV로 중계되는 청문회장에서 파인만은 얼음물에 O링을 담가 접합부가 헐거워지는 실험을 직접 수행해 사고원인 규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다들 이런저런 눈치를 보며 대충 넘어가려 할 때 그는 눈치가 없을 수 있었다. '쓸데없는 책임'에서 자유로운 덕분이었다.


"난 완전히 자유라 아무 간섭 없이 마음껏 행동할 수 있어. 여기는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단순한 목표를 두고 끝까지 가보려고 해. 물리적으로 왜 왕복선이 실패했는지만 보려고."
- 집에 보낸 편지에서




“과학자는 탐험가이지만 철학자는 구경꾼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과학자가 또한 철학자였던 것과 달리 파인만은 른바 실재적 지식에 기여하지 않는 에는 전혀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말뿐인 형이상학을 가치절하했다. “과학자는 탐험가이지만 철학자는 구경꾼이다.” 종교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말할 것도 없다. 태생은 유태인이었지만 무신론 유물론자로 살았다.


"우리는 소통이 잘 되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우리가 하는 건 일종의 거대한 번역이지요. 당신한테는 명백한 내용이 어떤 이에겐 이해하기 무척 어려운 까닭은 당신의 말을 그 사람의 특정한 관점으로 번역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유머와 여흥을 즐길 줄  파인만이 철학에 대해서 이 같은 견해를 가졌다는 사실은 솔직히  놀랍다. 과학자가 모두 철학자라고 일반화시킬 수야 없지만 혹 반대로 과학자에게 철학은 뜬구름 잡는 얘기라(파인만이 대표사례가 되어) 일반화되는 것도 유감스러울 일이다. 이론물리학 영역이라 특히 더욱 그렇다. 멀리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소환하지 않는다 해도 갈릴레이나 뉴턴, 아인슈타인 등이 잉태한 만유인력, 상대성이론 같은 놀라운 개념의 비약적 탄생 아래 철학적 소양이 받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파인만이 활약한 20세기 후반의 물리학계가 이론보다 기술적 응용을 우선시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파인만의 취향은 유독 파인만스러웠지 않나 한다. 루프양자중력 이론을 제창한 카를로 로벨리의 말처럼 "과학과 철학의 대화는 필요하다". 아인슈타인도 스티븐 호킹도 그토록 원하던 Theory of Everything '모든 것의 이론'을 끌어낼 창발성이 발현되려면 말이다.




구술된 수업내용 외에 정작 파인만이  책은 한 권도 없지만 드럼 친구 랠프 레이턴과의 대화로 남긴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Surely you're joking Mr.Feynman)》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술집을 드나들고 여자를 홀리고 자물쇠를 따고 드럼을 쳤으면서도 예술에 대해서 문학에 대해서 종교와 윤리의 영역에 대해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아까운 시간을 투자할만큼 '실용적인' 지식이 아니었다. 파인만의 강의는 열정적이었지만 스스로는 교양서적은커녕 과학책도 읽지 않았다. 신화의 세계에 거부반응을 보였던 그현대에 하나의 신화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그는 신이 아니었다. 인간이었다. 괴짜고 천재였지만 사람이었다. 놀기 좋아하는 카사노바의 이면에 죽은 아내에 대한 순애보가 있었고 TV 프로그램에 셀럽들사랑하는 물리학자소개되 매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괴짜 천재' 캐릭터가 가능했이유는 보통사람들이 고민하는 많은 일반적 가치들에 무관심한 채 좋아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았때문이란 사실기억해둬야 할 것 같다. 물론 그 조건마저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따낸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타고난 천재성으로만 것은 반쪽 감상으로 보인다. 독존하는 것 -혹은 그런 것으로 보이는 것- 아래에는 그럴 수 있도록 감내해 준 다른 무엇들이 반드시 있다. 맥스웰의 악마 -극단적 확률을 가능케 하는- 아무리 열심히 문을 여닫는다 해 엔트로피의 증가를 할 순 없다. 파인만그걸 모르고 살진 않았을 것이다.


리처드 파인만은 "솔직하고 과감하게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장단에 맞춰 춤추다" 갔다. 그로선 후회 없이 잘 놀다 갔는지 모른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갔다. 연구할 때 피폭된 방사선으로 말년에 암투병을 한 파인만은 1988년 2월 15일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중 다음의 말을 으로 남기고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I'd hate to die twice. It's so boring.
지겨워서 두 번은 못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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