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반복된다.
- 조지 산타야나
조선 최고의 부자 집안이 있었다. 추산에 따르면 1조 원 대 재산을 소유했고 양주 일대가 모두 그들 땅이라 동대문쯤 이르러서야 겨우 남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는 가문. 재력뿐만 아니었다. 영의정만 네댓 명, 대대로 나랏일을 집안일처럼 맡아온 명문 사대부가. 그런 집안 형제들이 어느 날 한마음 한뜻으로 전 재산을 처분하고는 춥디 추운 남의 땅으로 넘어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생을 바쳤다. 이회영 6형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당 이회영(1867-1932)은 경주 이씨 가문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이유승은 고종의 이조판서였다. 조상 중엔 정승 판서가 수두룩했다. 10대조 할아버지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이다. 맞다. 오성과 한음의 그 이항복.
6형제는 지금도 금싸라기 땅인 명동성당 앞 YMCA 자리에 살았다. 그러다 1910년 경술국치가 터졌다. 6형제는 한자리에 모여 결심했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하게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1910년 12월 30일, 우당 6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하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향했다. 소 13,000마리에 해당하는 값이었다. 지금 돈으로 적게 잡아도 650억 원이다. 급히 처분하느라 제값 받고 다 팔지도 못했다.
현지에 한인 정착촌을 만들고 신민회, 상동청년학원, 경학사, 고종 망명 계획, 의열단, 다물단, 항일구국연맹, 흑색공포단 등 수많은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중엔 헤이그 밀사 파견처럼 교과서에 익히 나오는 사건도 있다. 또 익숙한 이름으로 신흥무관학교가 있다.
김원봉. 청산리 전투. 신흥무관학교와 관련된 이름들이다. 이동녕 등과 함께 우당 형제들이 1911년 신흥강습소를 설립했고 이것이 발전해 1919년 신흥무관학교가 되었다. 이곳 출신 독립군들이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였고, 영화 《암살》의 의열단 단장 김원봉도 이곳 출신이다.
해방 이후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국내에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해 그 명맥을 이었는데, 6.25 전쟁을 거치면서 재정난을 겪게 되어 1951년 조영식 박사가 인수했다. 1960년 교명이 바뀌었으니 지금의 경희대학교다.
<기구한 운명의 독립운동 2세들>
안중근 의사 집안의 안타까운 이야기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안 의사 순국 후 7살 장남 분도는 누군가에게독이 든 과자를 받아먹고 죽었다. 어려서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차남 준생은 1939년 일제의 회유에 의해 아버지가 저격한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사찰 박문사에서 -지금 신라호텔 한옥호텔 자리- 그 아들에게 사죄하는 이벤트의 주인공이 된다. 소설《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에서 안준생은 다음과 같은 말로 항변한다.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다. 나는 나라의 재앙이었겠지만 내 가족에겐 영웅이다."
우당 형제의 2세들 사이에도 교차된 기구한 운명이 있다. 이회영 선생은 1932년 중국 다롄에서 체포당해 65세의 나이에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나흘 만에 옥사했다. 이때 그의 동선을 일제에 밀고한 이는 다름 아닌 조카였다. 그리고 그 조카를 처단한 사람은 선생의 아들이었다.
우당 6형제 중 가장 부자는 둘째 이석영이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쏟아부은 영석 이석영 선생(1855-1934)은 팔순의 나이에 옷 한 벌만 남기고 상하이 빈민가에서 굶어 죽었다.
이석영 선생의 장남 규준은 친일 변절자를 암살하는 다물단 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북경에서 암살됐다. 그런데 차남 규서는 거꾸로 숙부 이회영을 밀고했다.
이회영의 아들 규창은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밀정의 정보원이 사촌 이규서임을 알고 그를 처단했다. 이회영 선생은 조카 때문에 잡혀 죽었고 이석영 선생 또한 조카에 의해 대가 끊겼다. 참으로 기구한 가족사다.
그 처연한 시대를 산 이들에게 이와 같은 부조리한 운명이 한둘이었을까. 한 가족이라고 다 같은 판단을 내리도록 시대가 호락호락하게 놔뒀을까. 지금의 우리라고 그때라면 얼마나 달랐을까. 한탄스러운 건 물심양면 목숨마저 바친 독립투사의 후손들에게 10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유독 가혹한 현실이다.
이회영 선생의 아들은 이후에도 밀정 처단에 주력했고 일제에 체포된 뒤 감옥 안에서도 일제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투쟁했다. 어제 SBS 뉴스는 그를 포함한 일제 말기 <조선인 요시찰인 약명부> 790인의 블랙리스트를 보도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인 우당 6형제 중 5명이 독립운동으로 죽었다. 유일하게 광복을 본 것은 다섯째 이시영 선생이었다. 임시정부 법무부장을 역임한 그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이회영 선생의 손자들은 최근까지 활동한 정치인이다. 김대중 정부 때 이종찬 국정원장과 5선 이종걸 의원이 그들이다.
<이은숙 여사 (1889-1979)>
이회영 선생은 신분 해방과 적서 차별을 없애는 등 근대적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당시 양반 입장에서 쉽지 않은 여성의 재혼에도 찬성했다. 본인도 첫 부인과 사별 후 1908년 한산 이씨 이은숙과 재혼했다.
이은숙 여사 역시 결혼하자마자 만주행에 합류했다. 만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열 남매를 키우고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남편이 순국한 후엔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광복을 기다렸다. 가문의 재산은 독립운동 8년 만에 바닥이 나서 일주일에 세 번 밥을 하면 운수 대통이라 할 정도로 궁핍했다. 여사는 <서간도시종기>라는 수기를 썼는데 독립운동 이면의 투쟁을 보여주는 귀한 사료다.
남편이 이역만리에서 옥사한 뒤 이은숙 여사가 쓴 조사가 있다. 간결하면서도 품격 있는 명문이 비장히 마음을 울린다.
“일생의 몸을 광복 운동에 바치시고 사람이 닿지 못하는 만고풍상을 무릅쓰고 다만 일편단심으로 ‘우리 조국, 우리 민족’ 하시고 지내시다가 반도 강산의 무궁화꽃 속에 새 나라를 건설치 못하시고 중도에서 원통 억색히 운명하시니 슬프다”
<2023년 3월 1일에 돌아봄>
우당 형제들은 일제의 추적에 대비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모든 자료를 철저히 없앴다. 또한 이회영 선생은 아나키스트적 사상을 지녔기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덜 알려진 측면이 있다.
한편, 이은숙 여사의 이름은 아예 가려져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서훈된 독립유공자가 약 13,000명인데 그중 여성은 채 300명이 되지 않는다.
"공과 사를 구분할 것."
어려서부터 익히 듣고 배워온 덕목이다. 그런데 글쎄, 요즘 세태엔 구태의연한 가치가 되지 않았나 싶다. 뉴스나 소셜미디어를 보면 당당하게 -때론 뻔뻔하게- 가진 걸 -또는 받은 걸- 누릴수록 어째 더 선망받는 것 같다. 금이건 흙이건 중요한 건 출신보다 처신일 텐데. 현대 우리 사회의 지도자란 사람들이 틈나는 대로 얼마나 열심히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그걸 어떻게 기발하게 숨겨왔고, 드러난 뒤에도 눈 하나 꿈쩍 않고 어찌나 태연하게 남 탓을 하는지, 목숨 바쳐 지켜낸 이 땅에 불과 100년도 안 돼 벌어지는 꼴들을 보며 독립지사들은 무슨 생각을 하실지. 말 그대로 진정 공사 구분 없이 모든 것을 헌신했던 시대의 어른들을 생각해 보는 3월이다.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 우당 이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