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의 시신이 알래스카에서 사냥꾼들에게 발견되었다. 아무도 강제하지도 위협하지도 않은 죽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청년은 자의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오지로 향했다. 자발적 고립을 택해 자급자족을 추구하다 홀로 굶어 죽었다. 왜 그랬을까? 이해하기 힘든 청년의 죽음엔 어떤 의미가 숨어있을까?
향년 스물넷에 반 자발적 아사로 생을 마감한 자칭 알렉산더 슈퍼트램프, 본명 크리스 맥캔들리스의 죽음은 1992년 실제로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실화다. 할리우드 배우이자 감독 숀 펜이 메가폰을 잡아 《인투 더 와일드》라는 영화로 재현되기도 했다.
고립된 공간에서의 처절한 생존을 그린 이야기들은 여럿 있다.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는 무인도에서 4년을 버텼다. 배구공 인간 윌슨이 버팀목이 되어줬다. 조난의 대명사 로빈슨 크루소는 소설 속에서 무려 28년을 생존했다. 그의 곁엔 프라이데이라는 어쩌다 동반자가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의 방점은 보통 '살아남기'에 찍힌다. 실화도 있지 않느냐고? 패전 후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필리핀 밀림에서 29년 동안 숨어 지낸 일본군 오노다 히로오는 상명하복에 투철한 군국주의자였다. 그에게도 함께 낙오된 동료 패잔병들이 있었다. 이처럼 조력자를 필요로 하는 생존의 상황이 대부분의 케이스인 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죽음의 길로 걸어 들어간 멀쩡한 청년의 어리석은 고립은 일견 쉬이 이해되지 않는다.
맥캔들리스가 알래스카 오지로 찾아 들어가는 길에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이런 증언을 한다. "예의 바른 청년이었어요", "뭔가 신념에 가득 차 보였어요", "내가 볼 때 그가 힘들게 산 건 생각이 너무 많아서였던 것 같아요".
청년은 바보가 아니었다. 유복한 가정에 번듯한 대학을 나왔고 오히려 평균 이상의 지성을 보였다. 똑똑한 모범생이었던 그는 최종 알래스카로 향하기 전에 네바다에서 멕시코까지 나름 성공적인 여정을 경험하기도 했다.
너무 똑똑한 것이 문제였을까? 창의적인 사람들 중 다수가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때로 지나치리만치 고립되어 지낸다. 정결한 이상주의자들에게서 종종 너무 엄격한 도덕적 잣대와 경도된 흑백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크리스 맥캔들리스가 오지로 챙겨 들어간 몇 안 되는 소지품 중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 있었다. 《월든》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아예 모르는, 근현대 가장 사랑받는 사상서 중 하나다. 도시를 떠나 숲 속 호숫가에 작은 통나무 집을 짓고 2년여를 자급자족한 소로는 자발적 고립을 통해 깨달은 심오한 초월철학을 기록으로 남겼다.
청년은 시대의 지성인 소로를 은둔의 자연인으로 표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로는 사회로부터 도피한 것도, 신선놀음을 위해 숨어든 것도 아니었다. 그는 파이터였다. 미국적 삶에 반기를 든 반골이었다. 인간성을 잃어가는 산업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자본과 권력에 맞서 투쟁한 실천주의자였다. 《월든》보다 먼저 쓴 책 《시민 불복종》에서 그는 "국민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메시지로 후대 많은 이에게 저항의 정신을 심어주었다.
사랑보다, 돈보다, 명성보다, 진실을 내게 달라. 나는 기름진 음식과 와인이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 앉아 극진한 시중을 받았지만 거기에 진심과 진실은 없었다. 나는 배가 고픈 채로 그 불친절한 식탁을 떠났다. - 《월든》 중
크리스 맥캔들리스는 윗구절이 쓰인 페이지 위에 커다랗게 ‘진실’이라고 적어 넣었다. 청년은 소로처럼 진실을 찾고 싶었을 거다. 그러기 위해 사람들을 떠났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돌아갈 계획이었을 거다. 마치 소로처럼, 식탁은 떠났지만 세상 자체를 회피할 생각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24살 청년은 현실의 혹독함을 (혹독함의 현실을) 인정하기엔 아직 너무 어렸고 수긍하기엔 너무 젊었다.
알래스카의 극한자연에 익숙한 현지인들을 비롯, 많은 사람들이 준비 없이 이상만 갖고 뛰어든 청년의 무모함을 탓했다. 실제로 맥캔들리스의 사고는 자연을 아름답게만 보는 낭만적 시선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알려주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생존을 책으로 배운 청년은 커다란 무스를 사냥하고도 올바른 보존 방법을 몰라 고기를 모두 버려야 했고, 야생 식물을 잘못 채집해 먹다가 독성물질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고 버려진 버스 안에 누워서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꼼짝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립된 장소에서 불과 몇 km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 통나무집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큰 죽음이었다.
특이한 청년의 어리석은 치기가 부른 황당한 새드엔딩.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자업자득이라고 비난하거나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일화성 가십으로 소화하고 흘려보냈다. 하지만 이 스토리는 너무나도 명백한, 그래서 오히려 의외인 인생의 교훈을 막판에 숨기고 있다.
속세를 벗어나고자 했던 맥캔들리스의 시도는 미성숙했으나 그의 의도마저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삶의 본질을 찾아 자신의 한계를 시험한 그의 용기는 탐구자의 용기이다. 제자리의 안락에 머무르지 않고 더 큰 가치를 향해 손에 쥔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이런 용기야말로 지성인의 특성이다. 맥캔들리스는 그런 지성인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지성인은 고독하다.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는 길은 포장도로가 아닌 뭇사람들이 회피하는 골짜기 길이기 때문이다. 고독한 탐구의 길 끝에서 지성인은 진리의 한 자락을 발견한다. 인간의 본질이자 근원적 한계의 자락이다. 맥캔들리스가 고행 끝에 깨달은 그 진리, '인간은 함께여야 살아있다'.
이 자명한 진리의 값어치는 고독해보기 전과후가완전히 달라진다. 야생 속에서 단독자로 섰을 때 인생은 엄청난 무게감으로 깨달음을 안겨준다. 공기처럼, 중력처럼, 정작 같이 있을 때는 미처 캐치하지 못했던 가치. 때로 길은 멀리 돌아도 골은 한 곳에서 만난다.
죽기 며칠 전, 크리스 맥캔들리스는 톨스토이의 《행복》을 읽고 감동적인 몇 개의 구절에 표시를 해두었다. 그리고 마지막 메모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