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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Mar 18. 2022

찰스는 왜 그랬을까

(영국 왕실 비화)

1971년, 십대의 다이애나

1981년, 유부녀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 찰스 왕세자는 영국 왕실을 위한 형식적 왕비로 스펜서 백작의 셋째 딸 19살 다이애나 스펜서를 택했다. 약혼 즈음 행해진 미디어와의 인터뷰 기록을 찾아보면 얼굴에 설렘과 부끄러움이 여실히 깃든 십 대 왕세자비와 달리 서른 둘 왕세자의 표정에선 왠지 진실한 사랑의 표징을 찾기 어렵다. 웨일스 공 찰스 필립 아서 조지는 감회를 묻는 질문에 "사랑합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라는 모호한 답만을 되풀이했다.


1981년 7월 29일, 세기의 결혼식 @세인트 폴 대성당, 런던


애초부터 다이애나는 영국 왕실 생활적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대중 앞에 보이는 공적인 이미지와 반대로 돌아서면 냉담한 왕가 식구들의 태도가 젊고 순진한 그녀의 심성을 짓눌렀고, 국민공주라는 미명 하에 관음증을 채우기 위해 죽도록 따라다니며 괴롭힌 (그리고 결국은 죽인) 파파라치들은 그녀에게 숨 쉴 단 한 뼘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수만 하객의 축하 속에 거행된 성대한 결혼식 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것이라고 온 세상이 믿은) 신부 다이애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힘든 세리머니를 겨우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눈물을 쏟아냈다. 결혼 기간 계속해 반복된 거식증과 폭식증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러 번의 자살 시도가 있었고 계단에서 몸을 던진 적도 있었다. 결혼 전 키 178cm 허리 29인치의 건장한 체구였던 그녀는 결혼  23.5인치의 뼈 밖에 남지 않은 몸이 되었다.





윌리엄과 해리 두 금쪽같은 아들을 얻은 다이애나는 엄마의 힘으로 죽을힘을 다해 살았다. 왕세자비로서 봉사 활동에 힘쓰며 삶의 의미를 찾았다. 세기의 패셔니스타로 주목받으면서도 극빈 아동과 나환자들과의 접촉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에이즈 병원을 방문하여 사람들과 악수할 때도 장갑을 끼지 않았다. 국민들은 그런 그녀를 사랑했고 찰스는 그런 그녀를 시기했다. 영연방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해 거리를 가득 메운 대중들의 환호가 다이애나를 향하자 만찬 자리에서 "카 퍼레이드 때 양쪽에 앉힐 수 있도록 아내가 둘이었으면 좋겠다"는 치졸한 언사를 공개적으로 내뱉는, 그런 정도의 위인이었다.


1992년, 인도 캘커타에서 테레사 수녀와 함께


1997년, 앙골라 지뢰 피해 아동들과 함께




15년 간 최선을 다 해 불행했던 왕세자비의 삶을 정리하고 1996년 이혼하여 일반인의 몸이 된 다이애나는 한 사람의 인도주의자로 앙골라를 찾아 지뢰에 다리를 잃은 소녀를 꼭 품어 안아 주었다. 지중해에서 휴가를 보내며 다시금 생기가 도는 듯한 그녀의 곁엔 헤롯 백화점의 상속자 도디 파예드가 새로이 자리를 잡았다.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의 리츠 칼튼 호텔에서 파파라치들의 집요한 추격을 피해 질주하던 벤츠 리무진 한 대가 퐁드랄마 지하차도 기둥을 들이받고 멈춰 섰다. 도디 파예드와 운전사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다이애나 뒤로 파파라치들은 플래시를 터뜨리기에만 집중했다.



다이애나의 장례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그녀의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친구 같았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비탄에 잠긴 윌리엄, 해리 두 왕손 옆으로 상복을 입은 찰스 왕세자와 엘리자베스 여왕이 도열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보여준 왕실의 마지막 성의였다.


왼쪽부터 장례식의 찰스 왕세자, 해리 왕손, 윌리엄 왕세손


2005년, 웨일스 공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윈저는 콘월 공작부인 카밀라 로즈메리 샌드와 공식적으로 재혼하여 35년 불륜의 꿈을 이뤘다.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를 추모하며

Diana Frances Spencer (1961.7.1-1997.8.31)



호주에서 본 찰스 3세 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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