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을 즐기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일을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였으니 4년쯤 되었으려나. 일에 대한 욕심이 생기자 옷에 대한 욕심이 자연히 줄었다. 무엇을 살까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편하고 효율적인 옷들로 채웠다. 집중을 해치지 않을 옷, 별다른 고민 없이 입을 수 있는 옷들로. 이제는 10분이면 준비하고 집 밖을 나설 수 있다.
지난주 여성리더스포럼에 다녀왔다. 을지로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호텔 입구부터 으리으리하고 화려했다. 금색 문을 밀고 들어가자 인공폭포가 쏟아졌다. 수십 개의 원형 테이블이 한쪽을 바라보고 있는 행사장에는 뉴스에서만 보던 국무총리와 여성가족부 장관이 서있었다. 이렇게 큰 행사는 처음이었다.
자리에 앉은 참여자들 하나 같이 격식 있는 옷을 입었다. 화려한 트위드 자켓을 세트로 입은 사람, 왕리본 블라우스를 입은 사람, 명품 목걸이를 두른 사람. 커리어우먼을 위한 쇼핑몰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나는 검은색 목티에 심플한 코트를 입었다. 나름 점잖게 입고 갔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원형 테이블 맞은편에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 역시 세련되게 차려입었다. 정면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올해는 어린 친구들이 많네”라고 흘리듯 말했다. 어른의 세계에 잘못 들어온 어린이 같았다.
포럼을 마치고 옷을 사러 갔다. 큰 행사에 어울리는 옷을 사고 싶었다. 명품을 두르진 못하더라도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었다. 옷을 하나하나 넘겨보다 그럴듯한 자켓을 발견했다. 검정색과 흰색이 섞인 큼직한 단추가 달린 트위드 자켓이었다. 사이즈가 맞는지 걸쳐보았다. 잘 맞았다. 트위드 자켓을 입으니 단숨에 신경 쓴 분위기가 났다. 그래 트위드 자켓 하나쯤은 있어야지.
잘 어울리네!
근데 너가 만들려는 회사랑 어울리나?
옆에 있던 애인이 말했다. 화려함에 취해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 상황에 맞추려다가 나다움을 잃을 뻔했다. 디지털노마드를 위한 여행을 만든다면서 트위드 자켓이라니! 트위드 자켓을 도로 옷걸이에 걸었다.
돌이켜보니 포럼에서 인상적인 인물들은 나다움을 드러내는 옷차림을 했다. 상황에 맞는 옷이면서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았다. 켈리최 회장은 새빨간 슈트를 입고 나와 열정적으로 동기부여 강연을 했고, 이슬아 작가는 평범해 보이지만 포인트가 있는 원피스를 입고 차분하고 힘있게 이야기했다. 옷차림과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졌다. 나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려면, 내가 하려는 일을 말하려면 나다움을 드러내는 옷을 걸쳐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차분해 보이지만 재치있다. 얼굴이 둥글둥글해서 어리게 생겼는데 단단히 밀고 나가는 강단이 있다. 타인의 이야기를 공감하면서도 자기주장은 확실하다. 늘 새로운 경험을 찾아다니지만, 한 번 붙잡은 일은 끝까지 한다. 자유롭고 독립적이다. 여행자를 위한 콘텐츠를 만든다.
이런 나에게 어울리는 옷이 뭘까? 음.. 당장은 모르겠다. 비슷비슷한 옷무더기 속에서 나다운 자켓을 찾을 수 있을까. 한동안 아우터 코너를 기웃기웃 거리겠다.
그럼에도 마냥 유행하는 옷을 따라사진 않을 거다. 어쩐지 쇼핑에 시간을 쏟던 과거보다 더 신중하게 옷을 고르게 되었다.
옷으로 나를 표현한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