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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ez May 04. 2022

신중한 여행자가 되기를

좀 더 간절한 여행이 필요해


첫 번째는 늘 설렘을 안겨준다. 난생처음 해외로 가는 스무살의 난 태국여행을 앞두고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고작 일주일의 여행인데도 함께 가는 친구들을 매주 만나며 세 달 내리 계획을 세웠다. 엑셀로 표를 만들어 시간대별 일정과 예산을 세울 정도로 열심이었다. 티켓을 사는 것도, 해외 사이트에서 호텔을 예약하는 것도, 낯선 언어의 인사말을 익히는 것도 처음이었다. 비행기를 타기 몇 개월 전부터 설렘을 쌓아가며 여행을 했다.


코로나 직전의 나는 첫 번째 여행과는 달리 여행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여행은 돈이나 시간,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나는 시간이 많은 대학생이었기에 벌어서 떠나고 또다시 벌어 떠나기를 반복했다. 항공권 검색 사이트인 스카이스캐너에서 Everywhere로 검색해 가장 저렴한 티켓을 구입하기도 했고, 팟타이가 맛있어서 방콕을 네 번이나 다녀오기도 했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고민보다는 어딘가 가야겠다는 마음이 앞장섰다. 여행을 가볍게 그리고 습관적으로 떠났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항공권을 구입한 건 2019년 1월. 발리로 가는 편도 티켓이었다. 인턴 계약이 끝나는 날에 맞춰 샀는데, 발리가 마음에 들면 몇 개월 동안 있다가 돌아올 작정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지고 WHO가 팬데믹을 선언하면서 발리여행은 무산되었다. 여행이 넘치는 시대를 지나온 나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시간도 많고 돈도 있는데 여행을 갈 수 없다니! 곧 떠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다르게 몇 개월이 지나도 해가 바뀌어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다음이 없으니 여행을 돌아볼 시간이 생겼다. 지금까지 몇 개국이나 다녀왔는지 문득 궁금해져 세어봤다. 그런데 나라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구글맵을 열어 경로를 짐작해보면서 간신히 다녀온 나라를 줄 세웠다. (어쩌면 한두 나라는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여행지를 찾아다니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여행할 기분이 아닌데도 에펠탑은 꼭 봐야 된다며 지친 마음을 끌고 다녀오기도 했고, 라오스에서는 남들 다 간다는 방비엥을 갔다가 불평만 잔뜩 하기도 했다. 매 순간 강렬했던 첫 번째 여행과는 다르게 여행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간절함이 옅어졌다. 그런데도 습관적으로 여행을 떠났다. 왜 가고 싶은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일정과 예산에 맞춰 밖으로 나갈 기회만 엿봤다. 잠시라도 여행이 없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막상 코로나로 2년 넘게 여행을 못 가게 되었는데 아무렇지 않다. 여행을 가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다거나 예전 여행사진을 찾아보며 추억팔이 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이 그리워  무착륙 비행을 한다는데, 그 기사를 보고는 덩달아하고 싶기는커녕 환경 걱정이 앞섰다. 오히려 여행을 하지 않으니 좋은 것도 있다! 돈 모으는 재미가 생겼다. 아무리 저렴하게 다녔어도 한 번 나갈 때마다 백만 원은 넘게 깨졌는데, 지금은 세계여행을 가려고 모았던 돈 보다 훨씬 많이 쌓였다. 그렇다. 나는 지금 여행 없이도 아주 잘 살고 있다.  


나에게 해외여행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니 신중해진다. 여행이 싫어지거나 지겨워진 건 아니다. 어디를 어떻게 가야 더 애틋한 마음이 들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해외여행이 가능해졌으니 당연하게 떠나기보다는 조금 더 간절한 마음을 뜸 들이고 싶다. 정말 가고 싶은 곳이 생겼을 때 설레는 마음을 안고 비행기에 오르고 싶다.

코로나 이후 떠나게 될 여행 역시 첫 번째다. 모두에게 여행이 사라진 긴 시간을 지나 처음으로 떠나는 첫 번째 여행이다. 첫 번째의 설렘을 가볍게 써버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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