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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May 16. 2021

핀이 피지 못했다

20210501

20210501 핀이 피지 못했다


오늘 핀이 시들었다. 정확하게는 시들어 있었다.


지난 주말에 꽃과 다육이를 샀다. 무언가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반려동물은 자취방에 들일 수도 없고, 동물을 무서워하기도 하고, 돌볼 깜냥도 없다고 생각했다. 식물은 부담 없이 키울 수 있지 않겠나, 하며 자취방 주변의 꽃집을 둘러보았다.


식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원래는 작은 다육이만 하나 사 올 셈이었다. 꽃집에 가서 물어보니 다육이는 한 달에 한번 물을 주면 된다 하여, 사장님 저는 좀 더 케어를 많이 할 수 있는 식물을 키우고 싶어요, 했다. 사장님은 화병 꽂이를 추천해주었다. 하루 혹은 이틀에 한번 물을 갈아주고, 줄기를 조금씩 잘라주면 된다고 했다. 그것도 너무 관심이 없는 건 아닐까 했지만 일단은 편하게 키워보자 생각하며 다육이와 꽃 한 송이로 정했다.

은은한 분홍빛이 마음에 들어 장미 하나를 골랐다. 장미의 품종은 ‘런던아이’라고 했다. 활짝 피면 더 예쁘다고 했다. 지금도 예뻐 보였다. 방으로 돌아와, 함께 산 화병에 물을 담고 장미를 꽂았다. 다육이와 함께 책상 위에 두었다. 방 안이 화사하게 느껴졌다. 코를 가까이 대니 향기도 꽤나 좋았다.


이름도 지어주었다. 장미의 이름은 ‘핀’, 다육이의 이름은 ‘정’. 각각 ‘활짝 핀’, ‘안정’이라는 의미였다. 우습지만 가끔 혼자 말도 걸어보았다. 과연 마음에 안정이 조금 찾아오는 것 같기도 했다. 장미가 조금 더 핀 것 같기도 했고.


일주일 간 꼬박꼬박 핀의 줄기를 잘라주고 물을 갈아주었다. 정이는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주는 게 끝이라, 혹시나 하며 화분의 흙을 가끔 만져보는 정도로 그쳤다. 얘네들이 잘 지내고 있는 건지는 잘 몰랐다. 하라는 대로 했으니 괜찮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어제부터 핀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지 않았다. 지어준 이름과 달리 꽃봉오리가 오므라들고 있었다. 분홍빛이던 꽃잎의 일부분이 노래졌다. 사장님이 다음에 화병을 갖고 오면 영양제를 뿌려준다 했던 게 기억이 났다. 영양제를 뿌리면 다시 활짝 필까 싶어 장미를 들고 꽃집에 찾아가기로 했다. 꽃집에 꽃을 들고 가는 게 꼭 동물병원에 동물을 데리고 가는 것 같았다.


오늘 화병을 들고 꽃집에 갔다. 얘가 왜 이렇게 시들시들할까요, 하고 사장님께 물어보았다. 통풍이 잘 안 되나요, 하고 사장님이 되물었다. 예, 통풍이 잘, 안 되죠,라고 대답하니 사장님이 그래서 그렇다고, 이미 많이 시들었다고 했다. 이런 경우에는 드라이플라워로 남길 수도 있다고 장미를 대뜸 화병에서 꺼내더니 홱 거꾸로 들었다.

그러자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버렸다. 장미는 볼품없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드라이플라워를 만들 수도 없을 것이라 했다. 사장님께 통풍은 보통 얼마나 해야 하는 건가요, 물어봤다. 거의 항상 해줘야 한다고 했다. 꽃을 키우는 게 어렵네요, 하고 나왔다.


위로의 뜻으로 받은 드라이플라워 두 송이와 빈 화병을 들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창문이 꼭 닫혀 있었다. 알바를 급하게 가느라, 밖이 아직은 쌀쌀해서, 누군가 방 안을 들여다볼까 찜찜해서, 그냥 어두컴컴하게 있고 싶어서. 창문은 열려있을 때보다 닫혀있을 때가 더 많았다. 나 밖에 없는 게 싫어서 무언가 들였는데도 여전히 나한테는 나 밖에 없던 것이었다.


화병에 꽂아 둔 꽃은 어차피 금방 시드는 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통풍을 잘했었더라면 잎이 그렇게나 힘없이 떨어졌을까. 마지막에 그렇게나 초라한 모습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방금 다녀간 사람인데요. 혹시 다육이도 통풍을 많이 해줘야 하나요.

다육이가 시드는 원인 중에 투탑이 과습, 통풍 부족이에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서는 창문을 열었다. 날이 흐린 가운데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직도 나만의 방인 좁은 자취방으로. 다음번에 다른 꽃을 보러 갈 때에는 다육이의 품종을 다시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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