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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May 16. 2021

타임캡슐을 묻었다

20210507

20210507 타임캡슐을 묻었다


고등학생 때 나는 10년 뒤의 나를 상상하곤 했다.


20대 후반의 나는 뭘 하고 있을까. 대학은 일단 졸업했을 거고, 유명한 기업에서 능숙하게 일하고 있겠지. 어쩌면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을 수도 있고. 투자의 귀재가 되어서, 아니면 능력을 인정받아서 몇십, 몇 백억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취미 생활도 빼놓지 않고 즐기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런 막연한 상상을 즐기다 잠들곤 했었다. 나는 미래에 대한 기대 섞인 상상을 많이 했다.


최근 우연히 동기부여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유재석의 말을 담은 영상이었다.


꿈도 목표도 계획도 없다 했다. 목표가 있으면 달성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싫다 했다. 그게 인상 깊었다. 확고한 목표를 설정하고 부단히 노력해야 최고가 되는 게 아닌가 했다. 다들 꿈이 중요하다, 목표가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의외였다.

20대 후반이 된 나는 이번 주에 또 채용 불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름 기대를 하고 있었던 곳이기에 실망이 더 컸다. 기대는 실망감에 의연할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인 것 같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한동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동안 실망한 일이 꽤 있었다.


인생의 중요한 일에서부터 아주 사소한 일까지, 거절당하고, 불합격하고, 꼬이고, 어긋나는 중이다. 기대와 다른 결과들에 실망하며 제자리에만 서 있는 중이다.


마냥 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행히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크게 좌절할 일은 없었다. 그럼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게으름을 극복하고 건강도 되찾아야 한다.


방의 다육이가 잘 자라고 있는 건지 물어보려 꽃집에 갔다. 친구를 만나러 다녔다. 꾸준히 일기를 쓰고 집에서 운동을 했다. 하루라도 빨리 다시 뛰기 위해 물리치료를 받았다. 새로운 곳에 자소서를 쓰고 학교에서 지원하는 모의 면접도 보러 갔다. 자격증 시험 하나를 대비하고 있다.


이렇게 움직이다 보니 또 기대를 하게 된다. 또 실망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그냥 어떤 순간을 기대하기로 했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 나는 도심 속 카페의 통유리로 된 창가 자리에 앉아 있다. 5월의 선선한 바람이 부는 주말 오후. 맘에 드는 음악이 나오고 있고, 시원한 민트 티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마주한 자리에는 든든한 동반자가 된 오랜 연인이 앉아있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마음이 잘 맞는 친구라도 좋다. 또 그것도 아니라면 혼자서 즐기는 시간도 괜찮다.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편안하다. 창 밖으로는 흔들리는 가로수의 넓고 푸른 잎들, 삼삼오오 오가는 사람들, 드문드문 지나는 차들.


지금의 나를 회상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 정말 힘들었다,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단지 그때가 문득 생각난 것이다. 미래의 나를 그려보던 그때의 내가 생각이 난 것이다.


그 순간을 타임캡슐처럼 마음속에 묻었다. 이제는 매일 주어진 일에 힘쓰는 것이다. 매일 한 발자국만큼 움직이는 것이다. 언젠가 나도 모르게 타임캡슐을 마주할 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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