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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Jul 11. 2021

원형 테이블과 빗살무늬 토기

20210711

20210711 원형 테이블과 빗살무늬 토기


새집에서 쓸 원형 테이블을 샀다.


이사를 오며 들이고 싶은 가구가 많았다. 전보다 방이 넓어져서 이것저것 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큰 침대와 책상과 아일랜드 식탁을 놓고 싶었다. 열어 둔 창으로 솔솔 들어오는 바람을 편히 느낄 수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키 큰 화초를 멍하니 지켜보는 상상을 했다. 내 취향의 책들이 진열된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읽었으면 했다. 그렇게 나른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건강 관리를 위해 운동기구를 잡고 운동을 하고 싶었다.


친구와 입주 청소를 한 뒤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생각보다 인테리어가 쉽지 않았다. 방의 구조를 고려했을 때 공간의 제약이 있었다. 원하는 가구들을 모두 배치한 시뮬레이션 속 방은 상당히 난잡했다. 더 넓어진 방에서 오히려 더 좁아진 방처럼 지내야 하는 것이었다.


친구와 아이디어를 쥐어짰다. 아직 에어컨도 없어서 카페로 피서를 갔다. 어떤 배치가 실용과 미용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지, 커피를 다 마시고 잔에서 후루룩 소리가 난 뒤에도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면을 그려 놓고 그 위에서 가구를 이리저리 돌리고 옮겨보았다. 해답이 보이지 않는 도면 위에서 묘수를 찾으려 했다. 무언가는 포기해야 하는 게 유일한 해답이었다. 괜한 도면만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친구가 답은 이미 나왔고 내가 결심해야 할 문제라 했다.

새로 이사 온 동네의 상징물 중 하나는 빗살무늬 토기다. 이곳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지의 영향이다. 한반도의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적지라는데, 얼마나 의미가 있는 곳인지 발행하는 지역화폐의 이름도 ‘빗살머니’라고 한다.


테이블이 없는 며칠 동안 방바닥에 배달음식을 펼쳐 놓고 허리를 굽혀 밥을 먹었다. 꼭 선사시대 사람 같았다. 그들처럼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만 갖고 지낸다면 뭘 포기할지 고민할 일은 없을 텐데. 어쩌면 그들과 생물학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는 내게 빗살무늬 토기 이상으로 필요한 게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배송받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서는 싹 사라진 생각이다.

비움과 채움의 균형을 찾는 게 어렵다. 맨바닥에서 웅크리고 밥을 먹는 것도 싫지만 가구에 부딪힐까 봐 웅크리고 방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싫다. 조금이나마 덜 싫어할 만한 균형을 찾는 게 해답이고, 어떤 일이든 그럴 것이다.


결국 책상을 포기하고 원형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놓은 채 이 글을 타이핑하고 있다. 식사를 하는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두는 게 찜찜하지만 밥 먹는 것도 방을 돌아다니는 것도 편하다. 다만 테이블을 자주 싹싹 닦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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