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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Aug 15. 2021

친구와 싸운 뒤에 했던 말

20210815

20210815 친구와 싸운 뒤에 했던 말


긴 시간을 잘 지내온 사이라도 가끔은 틀어질 수 있다. 지난여름 휴가의 일이다.


서울에서 지내는 친구 M과 나는 고향 친구들과 여름휴가를 계획했다. 물놀이로 무더위를 날리고,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게임들을 하면서 두고두고 이야기할 에피소드를 만들고자 했다. 저녁이 되어 그릴 앞에 앉아 술 한잔하면서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는 시간으로 마무리하는 그림을 그려보았다. 더할 나위 없었다.


가고 싶다고 느꼈던 그 순간부터 휴가는 시작됐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들떴다. 휴가의 모든 순간이 완벽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숙소를 구하고 놀거리를 구상했다.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준비한 휴가였다. 얼마나 열심이었냐면 현수막까지 주문제작을 맡겼다. 우리는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기대를 품고 있었다.


커질 대로 커진 풍선은 갑작스럽게 터져버리고 만다. 우리의 기대도 그랬다. 휴가 전날에 다다라서 문제가 터졌다. 친구들 중 둘이 다퉈 하나가 여행 불참을 선언했다. 놀러 가서 화해시킬 수준이 아닐 정도로 심하게 싸웠다. 설상가상으로 꼭 갈 거라 믿었던 다른 친구 한 명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아픈 녀석을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인원이 맥없이 쪼그라들고 말았다.


휴가 당일, 오랜만에 친구들끼리 모인 것만으로도 즐거웠지만 한편으로 남은 아쉬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게임이고 현수막이고 준비했던 건 모두 써먹지 못했다. 같이 올 예정이던 친구 둘이 없어서 풀장이 다소 허전했고 바비큐 테이블이 조촐했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툭툭 끊기는 느낌이었다. 밤을 새우며 놀아도 모자랄 판에 피곤이 몰려왔다.


아쉬움과 피곤이 사소한 트러블에 달라붙었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잠자리를 정하는 데 의견 차이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싸운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M과 나의 의견이 크게 대립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고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가슴께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잘 이야기해서 풀면 되는 일이었건만 나는 그날따라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빈정대고 있었다.


방에서 나와 펜션에 딸린 스파에서 혼자 머리를 식혔다. 금세 내가 꼴불견이었음을 알아차렸다. 평소 싫다고 느꼈던 행동을 내가 직접 했던 것이었다. 먼저 사과해야겠다 싶었다. 다시 방으로 갔으나 M은 핸드폰도 두고 펜션 밖으로 나간 후였다. 그만큼 많이 화났나, 나는 후다닥 나가서 친구를 찾았다. 산모기가 들끓는 밤에 어디까지 갔나 했다.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몰라 펜션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어두컴컴한 시골길 저 편에서 친구가 걸어오고 있었다.


막상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이 안 났다. 싸운 적이 별로 없었기에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애먼 말로 상황을 더 악화시키진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괜히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적당한 말을 고민하다 나는 친구 Y가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휴가 내내 하던 말을 건네보았다. 자기야.


그 말 한마디를 하고 M의 반응을 기다렸다.


M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왜, 자기야.


나도 실실 웃었다. 어딘가에서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미안하단 말을 꺼낼 수 있었고 온전히 혼자가 되어 나간 시골길에서 M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들을 수 있었다. 펜션으로 돌아오며 나는 시골이라 모기가 많더라 자기야, 하고 덧붙였다.

잘 맞는 사이보다는 잘 맞춰갈 수 있는 사이가 좋은 사이인 것 같다. 생각이 완전히 일치하는 사이는 있을 수 없다. 그에 가깝다 해도 상황에 따라 다툼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학창 시절부터 군생활까지, 그리고 지금은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친구를 작은 다툼 때문에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더욱이 ‘자기야’ 한마디로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얼마 전 M을 만났다. 말복에 맥주를 곁들여 치킨 한 마리를 같이 뜯었다. 그러고는 어둑해진 저녁에 동네 산책을 하다 조그만 공원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네를 탔다. 반대편에 몇몇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고 그 부모들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개그맨 조세호의 이야기를 했다. 조세호가 모 인터뷰에서 남창희 같은 이성이라면 같이 놀기 제일 좋지 않을까, 말했더니 ‘조세호 이상형은 남창희’라고 나갔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난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웃으면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친구가 요즘 빠져 있는 밈을 빌려 보자면,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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