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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Aug 22. 2021

네이버가 네이버다워야지

20210822

20210822 네이버가 네이버다워야지


버티고 버텼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네이버 앱 구버전이 이달 말부터 지원 중단된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네이버 앱이 신버전으로 업데이트된다고 했다. 신버전의 메인 화면은 구글과 비슷했다. 맘에 안 들었다. 앱을 켰을 때 뉴스 기사가 뜨고 실시간 검색어가 뜨는 빽빽한 화면이 좋았다. 사회 동향에 민감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그게 익숙했다. 앱을 사용하다 뭘 잘못 눌러 신버전으로 바뀔 때면 다시는 구버전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재빨리 구버전으로 되돌렸다. 이제 그럴 수도 없다. 낯선 네이버를 꼼짝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은 사회학자 에버렛 로저스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로저스는 신품종 옥수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다수의 농부들에게 의문을 가졌다. 더 많은 수확량을 보장하는 신품종을 심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뻔히 보였는 데도 말이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조차 전통 품종을 고집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에 로저스는 대학에서 농업을 공부하며 신품종을 전파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눈을 뜨게 된 것인지 그는 신품종뿐만 아니라 모든 새로움이 전파되는 데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혁신 확산 이론Diffusion of innovations’이라 명명한 이 이론에서 로저스는 혁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시간순으로 분류했다. 얼리 어답터는 이 중 혁신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소수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론에 따르면 얼리 어답터보다 혁신에 앞장서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로저스는 이들에게 ‘혁신가Innovator’라는 거룩한 칭호를 선사했다.


혁신에 가장 빠르게 나선 사람들이 영예를 안은 것에 비해, 가장 뒤에서 느릿느릿 따라간 사람들은 로저스에게 ‘Laggards’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받아야 했다. 다소 생소한 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이렇다. 늦깎이, 느림보, 굼벵이, 굼뜬 사람, 느리고 게으른 것을 가리킴.


나는 새로운 것에 늦는 편이다. 괜찮아 보여서 산 것들을 지인들에게 보여주면 이미 한두 해 전부터 유행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노래도 듣던 노래가 좋다. 신곡이 플레이리스트에 오르는 건 적어도 계절이 한번 바뀌고 난 뒤다. 이런 나는 ‘늦깎이Laggards’다. 21세기 사람인 내가 20세기 사람 로저스에게 한 소리 들으며 사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모든 게 변한다는 사실이다’라는 명언은 워낙 다양한 형태로 퍼져서 원형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사람들은 변화를 중하게 여긴다. 변화를 지켜보고 이에 앞장서지 않으면, 최소한 따라가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란 취급을 받는다. 늘 몇 발자국은 늦는 사람에겐 모진 이야기다. 그보다 더 꺼림칙한 건 스스로도 뒤처진다고 느낀다는 거다.


혁신, 변화. 이런 좋은 단어들에 거부감이 들면 꼰대나 겁쟁이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천성이 그렇다.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나는 자주 4차 산업혁명이 늦게 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미 도달해 있을 알쏭달쏭 인공지능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겐 가혹하고 각박할 것 같다. 얼마 안 살아본 나이에 내가 어떻고 세상이 어떻다 하는 게 섣부르지만, 얼마 안 살아봤는데 이런 느낌이 들어도 되는 걸까. MZ세대의 신선함을 강구하는 이 시대에 젊은 느림보인 나는 도태되고 마는 걸까.



놀라운 사실을 두 가지 알게 됐다. 하나는 네이버가 신버전으로 바꾸는 데에 2년 넘게 유예 기간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렇게나 오래 저항해왔는지 몰랐다. 다른 하나는 앱 이용자의 8%가 아직 구버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네이버 앱의 월간 활성 사용자 수가 3000만 명이라고 한다. 이백만 명이 넘는 동지가 최후의 전선에서 함께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고집스레 구버전을 쓰고 있을 사람들이 반가웠다.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이제는 별 수 없이 신버전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신버전으로 업데이트했다. 역시 낯설다. 메인 화면 중앙에 검색창 하나가 휑하게 보인다. 하단에 뜬 광고는 또 뭔가 싶다. 좋은 기능들을 더 편하게 쓸 수 있다는데 잘 모르겠다. 에잉, 네이버가 네이버다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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