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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Aug 29. 2021

수십만 원으로 수백 미터를 샀다

20210829

20210829 수십만 원으로 수백 미터를 샀다


500미터만 더 뛰면 된다. 남은 힘을 쥐어짜내야 한다. 심장이 요란하게 뛴다. 호흡을 유지할 수 없어 헥헥 소리를 낸다. 내뱉는 숨소리가 그야말로 공기 반 소리 반이다. 산책 중인 사람들이 쳐다보는 건 신경 쓸 새도 없다. 뱃속이 조이는 건지 꼬이는 건지 모르겠다. 두 단어를 합쳐 빠르게 외쳐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종아리는 뻐근하고, 허벅지가 이렇게나 무거웠나. 그러나 마지막까지 속도를 올려야 한다. 몸의 움직임에만 집중한다. 이제 정말로 코 앞이다. 필사적으로 목표 지점을 통과한다. 동시에 축하 메시지가 들려온다. 됐다. 천천히 걸으며 숨을 고르고 여유를 찾는다. 그리고 손목 위의 전자 기기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또 기록을 단축시켰다. 애플워치 덕분이다.

달리기를 삶의 낙으로 삼게 된 후 생긴 고민은 핸드폰이었다. 기록을 측정하려면 핸드폰을 들고 뛰어야 하는데 그게 너무 거치적거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이소에서 산 암밴드에 핸드폰을 넣고 뛰었다. 팔이 불편했다. 뛰다 보면 벨크로가 자꾸 떼어졌다. 핸드폰에 더해 암밴드까지 들고 뛰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다음엔 러닝벨트였다. 인터넷에서 만원을 주고 샀다. 이번엔 허리가 불편했다. 벨트가 자꾸 흘러내렸다.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벨트를 추켜올리느라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둘 다 달리는 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


더 나은 해결책을 찾다 애플워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애플워치엔 GPS 기능이 있다. 핸드폰의 러닝 앱과 연동시킬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것만 차고 뛰어도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시계줄만 바꾸면 일상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액세서리가 됐다. 애플워치는 내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어필했다. 지금 형편을 따져보면 거부해야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과소비인 걸 알면서도 구매 버튼을 눌렀다.


상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애플워치는 참으로 영롱했다. 핸드폰과 연동이 끝나자마자 바로 손목에 차고서는 평소 달리던 코스로 나가 뛰어보았다. 이거 오류인가 싶을 정도로 페이스가 빨랐다. 오류는 아니었다. 늘 같은 코스였으니 뛰고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체감상으로도 몸이 훨씬 가벼웠다. 어떤 거추장스러움도 없었다. 이전보다 현저하게 단축된 기록으로 목표 지점을 통과하며 이 좋은 걸 이제야 샀다는 말이야, 생각했다. 요 조그만 전자 기기가 사랑스러워서 나는 평소에도 애플워치를 차고 다니며 시계줄을 풀고 채우길 반복했다.

원래 씀씀이보다 크게 쓰면서 만족감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는 요즘이다. 가성비를 따져서 물건을 사면 얼마 안 가 비싼 물건을 사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비싼 건 그 값어치만큼 확실하게 더 좋다. 애플워치 이전에는 에어팟을 샀다. 값싼 블루투스 이어폰을 썼었는데 페어링이 제 맘대로였다. 그러다 보니 정작 필요할 땐 배터리가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나버렸다. 싼값에 산 것들은 딱 그만큼만 했다. 싸다고 산 청소기는 걸핏하면 헤드가 빠졌다. 싸다고 산 옷은 보풀이 잔뜩 일어나 있었다.


가난할수록 오히려 비합리적인 소비를 하게 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한정된 예산으로 필요한 것을 구매하려 하니 가성비를 따지는 데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그렇게 산 것들은 금방 낡고 고장이 나서 또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한다는 아이러니다. 모든 가격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애써 부정하려 했다.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즐겨봤던 웹툰의 농담이 아직 기억난다. ‘돈을 밝히는 게 아니야! 돈이 밝은 거야!’라고.


10km 언택트 마라톤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일정은 9월 말이다. 몇 년 전 기록보다 더 빨리 들어오는 게 목표다. 실은 헤어 밴드와 무릎 보호대도 샀다. 러닝화도 하나 새로 장만할 예정이다. 가볍지 않은 가격들이다. 장비가 필요 없는 운동인 달리기를 하면서 장비빨을 세워볼 생각이다. 그만큼 커피 한잔 덜 마시고 집밥 한끼 더 먹어가며 아껴야 한다. 이 정도로 투자했으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기록 경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누군가는 평상시에도 부담 없이 뛰는 10km를 혼자 엄숙한 마음으로 준비하게 됐다. 심심해진 입이 손목과 무릎과 발에 진중하게 메시지를 전한다. 너희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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