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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Sep 12. 2021

필사로 공책 한 권을 쓰면 일어나는 일

20210912

20210912 필사로 공책 한 권을 쓰면 일어나는 일


공책의 마지막 페이지 맨 밑 줄을 채웠다. 밤이었고 창밖은 조용했다. 뒤표지를 덮었다가 다시 펼쳐 다 채워진 공책의 맨 앞부터 되살펴 보았다.



휴학 중 일을 했던 어느 날, 다른 부서 사람이 우리 부서를 찾아왔다. 회의실에 우리 부서 사람 중 누군가 다이어리를 놓고 갔다고 했다. 이름이 적혀 있나 들여다봤지만 그런 건 없고 글씨가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부서 사람들 틈에 섞여 확인해봤다. 과연 뭐라고 써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자기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까 싶었다. 보다 보니 내 다이어리였다. 이 사람이 자기 글씨를 알아보는 데에는 몇 초가 걸렸다.



나는 악필이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가 엉망이었다. 크다 보면 나아질 줄 알았다. 실망스럽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글씨가 창피해졌다.


글씨 교정 책을 사서 해봤는데 똑같은 글자만 반복해서 썼다. 재미없었다. 글씨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얼마 해보지 않고 나아질 리가 당연히 없었다. 금방 포기하고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글씨 그대로 쓰고 살았다.


그러다 올해 늦봄에 글씨 교정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학교 문구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던 중 원고지 공책이 눈에 띄었다. 문득 필사를 해보려고 마음먹었다. 좋은 글을 손으로 베껴 적으면 글이 는다고 했다. 가갸거겨만 기계적으로 쓰는 것보다도 훨씬 재밌을 것 같았다. 글도 늘고 글씨도 나아질 묘안이었다. 공책을 덥석 집어 들고 카운터에 당당히 내려놓았다. 평범한 줄공책이 아닌 원고지 공책은 남달라 보일 것 같았다. 실상은 뽀로로 그림이 그려진 교정용 젓가락 같은 용도였지만.


처음 며칠은 손이 뻐근했다. 예쁘게 써보려고 펜을 쥔 손에 힘을 잔뜩 들였다. 저려오는 손을 몇 번씩 털면서 꾸역꾸역 한 페이지를 썼다. 종이를 꾹꾹 눌러가며 한 페이지를 쓰는 데 30분 정도 걸렸다. 고생해서 채운 원고지 한 페이지를 보니 손에서 머리로 짜릿한 성취감이 전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기 전 하루 한 페이지씩 쓰기로 결심했다.


좋아하는 글을 쓰다 보니 더 의욕이 생겼다.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을 베껴 썼다. 딱 한 페이지를 쓴다고 글의 흐름이 끊기는 게 아쉬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단호하게 공책을 덮고 대신 책을 한번 더 읽었다. 신나게 더 쓰다가 질려버리지 않았으면 했다.


질리지는 않았으나 빼먹는 날이 종종 있었다. 피곤하다고 핑계를 댄 날이 있었고 정말로 피곤했던 날도 있었다. 다만 그렇게 며칠을 쉬다가도 자기 전이면 원고지 공책이 생각나 흰 테이블 위에 공책을 펴고 펜을 들게 됐다. 그렇게 서너 개의 글을 쓰고 나니 공책 한 권을 다 썼다.




공책 한 권으로 글씨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같은 페이지 안에서도 똑같은 글자를 다채롭게 썼다. 평상시에 쓰는 글씨도 이전과 비슷했다. 실망스럽지 않았다. 필사가 그 나름대로 즐거웠기 때문이다. 내가 손수 쓰고 있는 글씨에만 신경을 쏟는 게 좋았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루틴을 지키고 있는 게 좋았다. 제각각이던 하루들에 일정한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 좋았다.


다음 필사할 책으로 책장에서 <강원국의 글쓰기>를 꺼냈다. 언젠가 좋은 글씨로 좋은 글을 쓸지도 모른다. 하루에 한 페이지로는 먼 미래의 이야기다. 지금은 그저 잠들기 전에 한 페이지를 채우는 게 남몰래 만족스럽다. 그런데 필사에 속도가 좀 붙은 것 같다. 이제 하루에 두 페이지를 써도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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