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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Sep 19. 2021

긴 머리의 추억

20210919

20210919 긴 머리의 추억


앞머리가 자꾸 눈을 찌른다. 머리가 많이 자랐다. 잘라야 하는데 자르기가 아쉽다. 머리가 꽤 맘에 들어서다. 그럴 때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오던 작년 이맘때의 사진을 꺼내서 본다.


전역이 슬슬 보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정말 잘생긴 남자 배우가 장발을 하고 드라마에 나왔다. 펌이 살짝 들어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스타일이었다. TV 속 그는 손에 든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혼자만 포착한 작은 화면 안의 풍경에 오롯이 빠져 있는 듯했다. 이 모습이야말로 현실에 초연한 보헤미안이다. 생활관의 2층 침대 위에 모로 누워 TV를 보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늘어난 생활복을 입고 스포츠머리를 한 그때의 나는 나가면 머리를 길러야겠다고 다짐했다.



본격적으로 머리를 기른 건 전역 후 몇 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나가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막상 나와서는 금세 없어져버린다. 사회로 나오니 장발을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심을 한 건 이때가 아니면 평생 못 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늦바람이 무섭다 했다. 젊을 때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고 나서 장발로 다니면 사람들이 더더욱 눈살을 찌푸릴 거라고 생각했다.


길러 보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장발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애매한 길이를 버티는 게 힘들었다. 앞머리가 눈을 가리지만 옆으로 넘길 수는 없는 게 불편하고 지저분했다. 거울 속의 내 꼴이 영 못마땅했다. 지질한 현실에서 벗어난 것 같은 스타일링을 하고 싶었는데 지질해진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도 슬슬 내 머리에 대해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이때 자주 변덕을 부렸다. 주말에 머리를 확 잘라버리기로 마음먹다 주말이 오면 결정을 철회하길 반복했다.


그 시기를 이겨내고 안정기에 접어들자 주변의 반응이 더 뚜렷해졌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뒷머리를 묶었다. 길거리로 나가면 사람들이 내 머리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지인들이 머리를 자르라고 부드럽게, 또는 강하게 권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인사보다 먼저 박장대소를 했다.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믿는 엄마는 이제야 진실을 마주하게 됐다. 긴 머리가 안 어울린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듣다 보니 나는 그 말에 면역이 생겼다.


사실은 어울리건 말건 그때가 가장 만족스러웠다. 원했던 머리를 하고 있는 게 좋았다. 앞머리를 손가락 사이사이에 껴서 쓸어 넘기는 기분이 좋았다. 머리카락이 뒷목을 덮는 안정감도 좋았고 그 뒷머리를 묶을 수 있는 것까지 좋았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만족하는 것으로 족했고 이대로 쭉 기르면서 다양한 스타일링을 시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현실에 초연할 수 없었다. 대학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젠 스스로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 긴 머리는 단체 생활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비칠 것이라 스스로 판단했다. 결국 애써 기른 머리를 잘라버렸다. 그날의 상실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루 종일 우울했고 그다음 날 아침에도 우울했다.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내가 초라했다. 더 초라했던 건 그렇게 머리를 잘랐지만 정작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던 회사는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머리를 자르기 전 사진을 남겼다. 사진관에 가서 예쁜 색깔의 배경을 뒤에 두고 상반신 사진을 찍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재미로 한 번씩 그 사진을 보여주곤 한다. 반응은 다양하다.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잘 잘랐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취향을 존중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역겹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말하든 나는 그 사진 속의 내 머리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어떤 반응을 하든 꼭 이 말을 덧붙여준다. 언젠가 이보다 훨씬 더 긴 머리를 할 거라고 말이다. 마음속 한 구석에 있지만 자주 들여다보는 희망사항이다. 언젠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찰랑거릴 것이다. 내 마음을 흔든 그 배우의 모습과 영 다르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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