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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Sep 26. 2021

올해를 읽어보았다

20210926

20210926 올해를 읽어보았다


침대에 누워 노닥거리다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올해가 100일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열어놓은 창밖으로 서늘함이 느껴진다. 이제는 하늘이 제법 이른 시간에 어둑해지는 것 같다.


올해 나는  했을까. 조금이라도 나아갔을까. 얼마 남지 않은 올해를 돌아보고 싶어 간만에 노트북의 일기 폴더를 열었다.


지난겨울이 끝날 무렵부터 일기를 썼다. 시작은 막연했다. 글 쓰는 습관을 들이려고 했다. 매일 드는 생각을 쓰면서 글감을 모으려고 했다. 밤마다 워드 파일을 켜고 그날 있었던 일을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썼다. 꾸밈없이 써야 좋은 글감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별 이야기를 다 썼다. 빈 페이지 위에서 나는 더러 나를 욕하고 남을 깠다. 마음속의 후회, 불안, 욕망, 열등감 따위를 쓰고 고해성사를 했다. 다른 사람이 선뜻 들어주기엔 부담스러울 이야기들을 혼자 털어놓으니 글이 줄줄 나왔다. 다 쓰고 나서는 혹 누가 볼까 봐 파일에 암호까지 걸었다.


못난 이야기만 쓰지는 않았다. 좋았던 일들, 고마웠던 일들도 자주 있었다. 좁은 자취방에 선선한 공기가 들어와 계절을 느꼈던 날이 있었고, 커피 한잔을 들고 산책을 하다 보랏빛과 자줏빛이 섞인 수채화가 하늘에 펼쳐져 벅찼던 날이 있었다. 친구네 자취방에 캔들을 켜 두고 불빛을 바라보며 타닥거리는 소리를 말없이 듣던 날이 있었다. 지인의 칭찬을 듣고 종일 속으로 함박웃음을 짓던 날이 있었다. 소소하게 좋았다고만 써 놓고 흘러가버린 순간들이 일기에 잔향으로 남아 있었다. 흐뭇하게 맡았다. 무색무취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기 속의 나는 나아가고 있었던가. 글쎄 잘 모르겠다. 고쳐야 한다 생각했던 것들은 몇 달 간의 일기에서 주문처럼 거듭 외우기만 했고 지금도 여전하다. 미약하게 나아갔다고 느낄 때가 있지만 멀리서 보기엔 무궁화 꽃이 핀 듯 그 자리 그대로 멈춰 있는 모양이다.


다만 휩쓸려 가지 않았다. 실은 그게 일기를 꾸준히 쓴 이유다. 밀려오는 파도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시기가 있었다. 입맛이 없고 갑갑했다. 하루하루 모랫바닥에 푹푹 빠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밤에 워드를 켜고는 몇 장씩 빽빽하게 채웠다. 느끼하고 청승맞은 글이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처럼 스스로에게 힘내자, 잘하고 있다, 괜찮다는 말을 많이 썼다. 그때 썼던 글을 보기 위해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사이로 읽어야 했다. 웃음이 절로 나왔는데 우습기만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덕분에 제자리라도 지켰다. 숨을 고르고 돌아보니 작은 파도였다. 이전에도 마주쳤었고 앞으로도 또 올 것이었다. 언제든 왔다 갔다 할 파도였다. 뭐가 왔든 휩쓸려 가지 않았고 그게 중요했다. 그래야 모래성을 만들든 수영을 하든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나니 간사하게도 일기 쓰는 게 귀찮아졌다. 바쁘다는 거짓말로 외면했다. 며칠씩 빼먹다 보니 일기 쓰는 습관이 움켜쥔 모래알처럼 금세 빠져나가 버렸다. 도움을 받고는 돌아서서 몇 달을 안 썼다.



다시 일기를 쓴다. 계속 쓰고 있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찾아왔다. 마냥 징징거리기 위해 찾은 것은 아니다. 일기가 잠잠히 들어주는 걸 당연히 여기는 게 죄스럽다. 대신 소소한 기쁨과 굼벵이만큼 기어갔다는 뿌듯함을 더 나눠보려고 한다. 그런 각오로 워드의 빈 페이지에 말을 걸었다. 그동안 좀 바빴지만 남은 올해도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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