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1
수요일 저녁, 구청에서 문자가 왔다. 다음날 수능을 볼 수험생들을 위해 구민에게 협조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수능시험일에 한국에서 수험생보다 중한 존재는 없다. 몇 년을 준비해온 모든 것을 쏟아붓는 한판 승부의 날이기 때문이다. 매년 수능 때마다 수험생을 돕는 미담이 들려오는 것도 다들 그 한판 승부의 부담감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수능 날의 기억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 법이다. 나는 그보다 더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우리 집은 입시에 무지했다. 시골 동네에선 흔한 사례였다. 먹고사는 게 바쁜 학부모들은 그저 우리 자식 바르게만 크길 바라는 게 대부분이었다. 상위권 입시를 꿰고 있는 교사도 없었다. 근처의 대학에 잘 보내는 게 전문인 학교에서 서울 상경을 꿈꾸는 학생들은 스스로 정보를 찾아야 했다.
그중에 나도 있었다. 인서울을 목표로 입시 커뮤니티를 뒤지며 입시 전형이나 좋은 학습서를 찾아봤다. 한 번은 혼자 모 대학의 입시설명회도 가봤다. 인근 도시의 컨벤션센터까지 갔다. 대강의실을 채운 좌석에 학부모들만 앉아 있었다. 학생은 나뿐이었다. 뭐가 중요한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설명회가 끝났고 혼자 지하철을 타고 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능 전날, 시험장까지 버스를 타고 가라 하던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일하러 가야 한다고 차를 태워줄 수 없다는 거였다. 단 하루의 건곤일척인데 버스를 타고 가다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생기면 어떡하라고. 결국 택시를 탔다. 가면서도 수능 당일 컨디션이 얼마나 중요한지 공감하지 못하는 부모님에게 속으로 투덜거렸다. 평정심을 유지하겠다고 같은 교실에 배정된 친구들과 대화도 일절 하지 않을 정도로 호들갑을 떨며 시험을 쳤다.
그 결과 예기치 못한 상황에 한판 승부를 말아먹는 일은 겪지 않았다. 다만 승부를 한판으로 끝내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가채점을 해보니 점수가 그리 출중하지 않았다. 과목마다 한두 문제씩 아쉬웠다.
모의고사를 잘 봤던 나는 수시 모집에 상향지원을 했었다. 이 점수로 ‘수시 납치’를 당하기 싫다는 굉장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수시는 수능을 본 후에 논술 같은 다음 절차를 치르고 나서야 나를 데려갈 수 있는 전형에만 지원했었다. 막상 수능 점수를 받으니 그다음 절차에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와버렸던 것이다.
친구들이 다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2차전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애초에 논술이든 뭐든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데 일정을 며칠 앞두고 준비한다고 잘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지원한 대학의 기출문제를 뽑아 놓고 눈에 바르기만 했다.
논술 시험을 치러 처음으로 혼자 서울에 가봤다. 아빠와 엄마는 이번에도 일 때문에 같이 갈 수 없었다. 캠퍼스에 들어가면서 각지에서 온 수험생들을 보았고 그들과 함께 온 학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았다. 시험장에 들어가서는 아무 말이나 써냈다. 시험이 끝나니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했다. 인파에 섞여 시험장을 나오면서 자기 자식을 기다린 부모들을 또 보았다. 가뜩이나 심술이 났었는데 캠퍼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버스커버스커의 <잘할 걸>이 울려 퍼졌던 게 기억이 난다.
잘하지 못해서 수시는 다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정시 모집 기간이 다가왔다. 그때쯤 재수를 알아봤다. 부모님은 반대했다. 한 번 더 해서 더 잘 될 거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별로 자신은 없었다. 어떻게 할지 결정을 못 내린 채 한숨만 쉬고 낮잠만 잤다.
그렇게 매일처럼 낮잠을 자던 어느 저녁이었다. 엄마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나를 깨웠다. 찬 겨울 공기 냄새가 났다. 서늘한 외투를 주섬주섬 벗고는 무슨 종이를 꺼내서 주는 것이었다. 어디서 알아왔는지, 정시 모집에 대해 적어 온 종이였다. 엄마는 적힌 것들을 가리키며 어디선가 들어온 정보를 설명해주었다. 엄마도 정확하게는 모르니 나더러 한번 더 알아보라고 덧붙였다. 그러곤 저녁을 차려주겠다고 방을 나갔다. 혼자 앉아서 종이를 다시 봤다. 보다 보니 정말 중요한 걸 공감하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조용히 눈물을 닦고는 종이를 잘 접어 지갑에 넣었다.
오랜만에 그 종이를 꺼내서 봤다. 별 적힌 것이 없는 이 종이가 입시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저기 부딪히며 살다가도 언제든 돌아갈 품이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따뜻한지 수능처럼 등급으로는 매길 수 없는 품이다.
자기가 다 큰 줄 아는 아들을 엄마는 아직도 어린애 대하듯 밥은 잘 먹는지, 밤늦게 돌아다니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 생각해보면 아들이 사는 게 꼬일 때만 전화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언제쯤 다 큰 아들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엄마에게 나는 여전히 한참 어리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