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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Dec 12. 2021

회계사 수험 생활이 끝나고 남은 것

20211212

20211212 회계사 수험 생활이 끝나고 남은 것


본가의 내 방엔 방치된 책들이 있다. 회계사 공부를 하겠다고 샀던 교재들이다. 쌓여 있는 책들을 한번 펼쳐서 볼까 하다가 그 위의 먼지 때문에 그만두었다.



나는 또래들보다 다소 늦게 입대했다. 계획이 꼬인 일이 있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회로 나올 때 나는 군대를 가야 한다는 게 불안했다.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계발을 장려한다는 의무경찰에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했다. 가서 회계사 시험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회계 강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기에 해볼 만하다 생각했다.


부대 배치를 받고 보니 들은 대로 자기 계발에 투자할 시간이 꽤 있었다. 부대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뒤부터 회계사 공부를 시작했다. 일과가 끝나고 여가 시간이 생기면 독서실로 가 책을 폈다. 외출 외박 때도 가방에 책을 가득 챙겨 도서관으로 향했다. 내가 입대했던 2017년에도 이미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PMP를 사서 동영상 강의를 받아 봤다. 그렇게 하루하루 계획한 만큼 공부를 해냈다.


세상이 어떤 계획에 따라 생겨났다면, 그 계획은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못하게 하자는 내용일 거다. 내 계획도 당연히 얼마 못 가서 틀어졌다. 예상치 못한 비상근무가 생겼다. 하루 종일 근무지에 있거나 근무지에서 하룻밤을 새고 돌아와야 했다. 공부할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자는 시간을 더 줄여 책을 봤고 작은 수첩을 챙겨 근무지에서 쉴 때 공부를 했다. 소대장님이 ‘저런 독한 놈은 뭘 해도 된다’ 라 말했던 기억이 난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펼쳐 둔 책 앞에서 불안하기만 했다. 집중이 하나도 안 됐다. 얼마나 더 봐야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했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몇 번이고 복습을 해도 다 잊히는 공부인데, 일단 진도를 따라가려고만 하니 공부한 것들은 그저 흘러 들어와 흘러 나갔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점점 체력이 떨어진다는 거였다. 무리하다 보니 근무 중 실수를 자주 하게 됐다. 부대에서도 내가 공부 때문에 부대 생활을 소홀히 한다는 이야기가 점차 나오고 있었다.


공부도 안되고, 군 복무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세법은 왜 이리 복잡할까. 내가 이런 재미없는 것들을 공부해 회계사가 된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난 왜 끈기가 없을까. 군대 가서 공부하겠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였나. 애초에 시작부터 하지 말 걸 그랬나. 공부를 할 때든 하지 않을 때든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수험 생활에 가장 부적합한 생각들이었다.


결국 시험을 두 달 앞뒀을 때부터는 거의 포기한 상태로 지냈다. 시간이 나도 잠을 자거나 TV를 보고 책은 거의 안 봤다. 어차피 택도 없을 텐데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독서실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었다. 전역하고 다시 준비할 마음도 없었다. 그래도 1차 시험은 보고 끝내야겠다 싶었다. 시험을 위해 아껴둔 특박을 쓰겠다고 행정반에 갔다. 아직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아는 중대장님이 나를 보고 말했다. 그래. ○○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험 치러 보내줘야지.



2월이 되었고 모 대학교에서 1차 시험을 봤다. 다 찍었다. 암기 문제 몇 개만 풀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댔다. 열심히 찍고 점심으로 삼각김밥과 우유를 대강 사 먹은 뒤 캠퍼스 구경을 했다. 그러다 다시 들어가서 남은 과목을 또 찍었다. 빨리 끝나기만 바랐다.


다 끝나고 나오니 저녁이었다.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이라 날이 제법 따뜻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왠지 모르게 길가의 큼직한 가로수들과 그 뒤에서 빛나고 있는 병원 건물이 유난히 예뻤다. 그게 기분이 좋았다. 동시에 내가 기분이 좋아도 되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시험을 보겠다고 그렇게 유난 떨고 돈과 시간을 투자해놓고는 다 찍고 나와버린 주제에. 눈치도 염치도 없이 날씨가 좋고 동네가 예쁘다고 기분이 좋아져도 되는 건가. 그런 양가감정에 결국 넋 나간 사람처럼 웃으면서 지하철역까지 설렁설렁 걸어갔다. 그게 내 회계사 수험 생활의 끝이었다.


회계사 수험 생활이 끝나고 남은 것은 2과목 과락을 받은 한참 부족한 점수의 성적표와 먼지 쌓인 채로 방치된 책들이다. 그것 말고는 없어 다행이다. 실패를 겪고 할 일 없이 사회로 나온 내 몸뚱이에도 먼지가 쌓일 뻔했는데 할 일이 생겨 다행이었다. 그때 나를 방치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게 정말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이지만 계획에 없던 행운도 종종 마주친다는 법이 짓궂다.


다음에 집에 내려가면 먼지 쌓인 책들을 다 버릴 생각이다. 글을 쓰다가 그때 느꼈던 갑갑함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실패가 인생의 밑거름이 되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저 이 실패를 회상하게 될 때 떠오르는 게 시험이 끝나고 본 예쁜 저녁 풍경뿐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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