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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Jun 06. 2021

라섹 수술 전날 밤의 사고실험

20210606

20210606 라섹 수술 전날 밤의 사고실험


라섹 수술을 받은 지 2년이 지났다.


지금 눈 상태는 아주 좋다. 시력은 1.0을 넘는 것 같다. 빛 번짐도 안구건조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혹 내가 둔감한 건가 싶다.


초등학생이 되기도 전부터 안경을 꼈던 내게 렌즈는 잘 맞지 않았다. 금방 토끼눈이 되었다. 몸에 뭘 달고 있는 게 불편해 액세서리도 잘 안 달고 다니는데, 눈알에 뭘 달고 있는 게 편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안경을 끼기엔 거추장스러운 일이 많았고 뭣보다 눈이 콩알만 해졌다. 이대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전역 직후, 돈과 시간이 모두 준비된 지금이 적기라는 판단을 내렸다. 며칠 만에 수술 일정을 잡았다. 피부만 살짝 까져도 크게 걱정하며 나를 아끼는 엄마에게 각막을 까 보겠다고 설득하는 데 애를 썼다. 설득보다는 일방적 통보에 가까웠다.


막상 수술일이 다가오자 겁이 났다. 행여 잘못되면 어떡하나 싶었다. 시력교정술에 관해 알아보겠다고 인터넷을 다 뒤졌었다. 부작용을 호소하는 이들이 모인 커뮤니티도 들어가 보았고, 부작용이 예상되니 하지 말라는 이들이 모인 커뮤니티도 들어가 봤다. 거기서 본 글들이 자꾸 떠올랐다.

수술 전날 밤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수술이 잘못돼 시력을 잃는 상상을 했다. 당연하게 해오던 본다는 행위를 하지 못한다면.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를 볼 수 없게 되고 나서야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건지 이제 알았으니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잘해보겠다고 떼써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라면.


잃는다는 느낌을 아주 살짝 엿보았던 밤이었다. 막막하고 서글펐다. 그러다 괜히 비장해졌다. 곧이어 세상 침착한 사람이 되었다. 아무래도 괜찮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오묘한 사고의 과정을 시로 쓰고 싶어졌다. 메모 어플을 켜고 떠오르는 대로 써내려 갔다. 감각의 상실, 이런 단어로 시작했던 것 같다. 다 쓰고는 한번 읽어보고 폰을 덮은 후 잠에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서 수술을 받으러 갔고, 알레르기 비염 때문에 눈이 퉁퉁 부었던 것 말곤 다행히 별 문제가 없었다. 회복이 다 된 이후로는 삶의 질이 높아졌다며 시력교정술 간증을 하고 다녔다.


그렇게 몇 달을 편히 지내다 잊고 있던 시를 우연히 읽어보게 되었다. 유치찬란했다. 뭐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척 이런 글을 썼는지. 민망함을 참을 수 없어 얼른 지워버렸다.


지금은 그때 그 시를 후회했다는 걸 후회한다. 시를 지우면서 수술 전날 밤의 느낌도 희미해져 버린 것 같다. 사고실험 역시 학문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시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아 아쉽다. 다만 왜 그런 시를 썼는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다행이다.


가끔, 몇 년 후 갑자기 눈에 이상이 생기는 건 아닐지 생각한다. 그때 나는 과연 수술 전날 밤의 사고실험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금방 침착해지긴 어려울 것 같다. 괜찮다가도 한없이 슬퍼질 것 같다. 생각만큼 쉽게 괜찮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계속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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