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 김치찜부터 시끌벅적 까지
이사 가기 3일 전.
돼지고기 김치찜을 하기로 했다. 냉동실에 있는 고기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새 집까지 가기에는 어려울 것 같았다. 어차피 친구와 이 동네에 대한 송별회 파티를 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고, 메뉴를 고민하던 참이었다. 양파와 대파만 사 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요리였으니까. 집 앞 홈플러스에서 양파와 대파를 샀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대형마트가 있는 것도 이번 주면 끝이니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추웠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데 뒷사람들이 광역버스 얘기를 했다. 여기서 광역버스 타면 서울역까지 1시간도 안 걸려. 강남까지도 금방 가고.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곳이지. 나는 더 이상 여기서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에 갈 일이 없겠지만, 맞아 그런 곳이지.
집에 와서 양파를 손질하면서 이 부엌이 참 익숙한 공간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너무 익숙해서 눈 감고도 도마를 꺼낼 수 있었다. 소금과 후추가 어디에 있는지, 다진 마늘이 냉장고 어느 칸에 있는지 모든 걸 훤하게 알 수 있었다. 십 년을 넘게 산 본가만 내려가도 자잘한 재료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허둥대곤 하는데 고작 2년을 산 이 집에서는 모든 게 내 손 아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내 손으로 놓은 것들이니까. 도마를 씻어 말린 것도, 소금통에 소금을 채워 넣은 것도 모두 나였다. 이 집의 그 어느 곳도 내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말이지 어느 무엇 하나도.
원체 요리할 때 손이 큰지라, 둘이서 먹을 돼지고기 김치찜을 3인분이나 해버렸다. 동네 친구를 하나 더 불렀다. 셋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이제껏 살면서 해 본 돼지고기 김치찜 중에 (객관적으로) 가장 맛있는 돼지고기 김치찜이었다. 다들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돼지고기 김치찜은 그냥 김치찜이 되었다. 돼지고기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는 귤을 까먹었고, 얼마 전 인터넷에서 구입했다가 이사 때문에 처치곤란이 되어버린 액설런트 아이스크림도 두 개씩 나눠 먹었다. 친구는 액설런트 파란색과 노란색이 맛이 다르다는 걸 알려주었다. 평생 살면서 처음 안 사실이었다.
그렇게 셋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다가 친구가 '감자전 먹고 싶다.'하고 뱉은 한마디 말에 감자를 사 오고야 말았다. 친구들이 강판에 감자를 갈고, 나는 옆에서 양파와 당근을 썰었다. 메뉴가 하나면 아쉬우니 비빔만두를 하기 위해서였다. 만두를 굽고 감자전도 구웠다. 친구는 귀찮으니 크게 굽자고 했고, 나는 끄트머리가 맛있으니 작게 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 개는 크게 굽고 몇 개는 작게 구웠다. 굽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그 사이에 미리 만들어둔 비빔만두가 다 식어버렸지만, 그래도 맛있는 2차 식사였다. 어이없게도 감자전과 비빔만두도 돼지고기 김치찜만큼 빨리 사라졌다.
'너네 뭐 이 집에서 갖고 싶은 거 없어?' 하는 내 말에 친구들은 맥북, 아이패드, 공기청정기, 닌텐도 스위치 같은 비싼 것들을 골라댔다. 그걸 골라대는 친구들도, 그걸 보는 나도 모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결국 친구들은 귀여운 가방이나 선글라스, 또 영화 소품으로 샀다가 쓸모없어진 것들을 한가득 골랐다. 오늘 자고 간다는데 내일 저것들을 다 어떻게 가져가려나 싶다. 그냥 웃음이 났다. 이사 가는 길에 짐이나 줄여볼까 하고 한 말이었는데 (친구 말에 따르면) 물욕에 가득 차 집안 곳곳을 뒤지고 다니는 게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맥시멀 리스트라고 잔소리도 한 소리 듣고.
우리 집은 항상 이렇게 시끌벅적했던 것 같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들도 참 좋았지만, 이렇게 친구들과 시끌벅적하게 별 쓸데없는 것들로 웃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진지하게 시나리오에 대해 토론하거나 촬영 계획을 세울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밥 해 먹고, 간식 먹고, 또 야식 해 먹으면서 내내 웃고 떠들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하루 종일 같이 낮잠 자고, 촬영 뒤 더러워진 집을 내내 쓸고 닦고, 냉장고의 유통기한 지난 음식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정리하고. 그냥 그렇게 함께 한 아무것도 아닌 일이 정말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런 기억을 돌이켜 본 하루였다.
우리 집 송별회, 참 괜찮았던 것 같다.
이제 잘 시간이다. 내일은 버릴 것들을 추려다 내놓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