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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Feb 04. 2020

위로가 되었던 공간

4년간 살았던 동네

이사 가기 4일 전.



 이 동네에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이 아닌데도 처음 같았다. 부산에서 살던 나에게는 아주 생소한 곳이었다. 겨울에 눈이 그렇게 펑펑 올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어서, 꼭 불을 밝힌 것처럼 환했다. 나를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부모님이 내려가시던 날도 눈이 펑펑 왔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부산에서 한 평생을 산 우리 부모님의 차가 미끄러질까 봐 얼마나 걱정이 되었던지. 그러면서도 내심 정말 좋았다. 눈이 너무 예뻐서, 세상이 온통 새하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무서운 것 같다가도 꽤 다정했다. 나만 처음인 줄 알았더니 모두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괜히 얼굴을 붉히다가도 별 것도 아닌 걸로 웃었다. 그 누구도 밉지 않았다.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자리였는데도 모든 게 말이 되는 자리였다. 어렵고 낯설었지만 그냥 모두가 사람이었다. 그때 내게 술 한 잔도 따라주지 않는다고 짐짓 어른인 척하던 선배는 이제 겨우 서른이 되었다. 그때 따라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던 선배는 이 동네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 없냐고 능글맞게 웃던 선배는 내 작품마다 응원을 보내주었고, 하늘 같이 무섭던 선배들은 내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 장난 하나에 그렇게 긴장하던 내 동기들도 이제는 선배가 되어 어엿하게 자신의 길을 닦아 나가고 있다. 고작 4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웃기도 많이 웃었지만, 그만큼 많이도 울었다. 언젠가는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어지면 죽을까?'하고 생각했던 밤이 있었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싶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 그날도 눈이 펑펑 내렸는데 그게 너무 예뻐서 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집으로 친구들이 찾아왔다. 왜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느냐고 들이닥친 그 친구들이 아직도 내 곁에 있다. 우리는 다음 집에서 또 새 역사를 쓰기로 약속했다. 언젠가 지금만큼 몸이 가깝지 않을 날이 오더라도 우리는 그 날을, 그리고 그 역사들을 기억할 것이다.


 통유리로 된 집은 가끔 불편하다. 바깥이 번화가면 더 그렇다. 바깥에서 번쩍이는 불빛들은 24시간 꺼지지 않는데, 사람은 가끔 불을 꺼줘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 불빛들이 나를 살게 했다. 집에서 내려다보는 그 불빛들이, 위에서 우리 집을 비추는 그 불빛들이 많은 그림을 보여주었다. 불을 끄고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천장이 빨강이었다가 파랑이었다가 흔들렸다가 깜빡였다가 그랬다. 그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하염없이 눈을 뜨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또 숨을 쉬었다. 그런 것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인테리어가 예뻐서 자주 드나들던 카페 사장님은 내가 카페 앞만 지나가도 인사를 건넸다. 시험 기간에 공부를 하고 있으면 카페에서 팔지도 않는 요거트를 가져다주셨다. 살면서 처음 해 본 알바는 언니들이 너무 아껴줘서 계획에도 없었는데 1년이나 했다. 직속상관이 얼굴 보자마자 '정말 예쁜 친구가 왔네.' 하는데 그만 둘 재간이 어디 있나. 눈이 오는 날이면 집 앞이라도 함께 걸어주던 친구가 있었고, 친구와 함께 살아온 속 얘기를 하며 엉엉 울기도 했다. 길을 걸으며 장난치던 설레던 순간도 있었고 술에 취해 길바닥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처음 만난 북 카페 사장님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며 이사 준비 잘하라는데, 도대체 어떤 누가 이 동네에 정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여기서 보낸 4년이 너무 힘들었다고, 치열했다고, 지쳤다고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참 많이 행복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4년 동안 나는 이 동네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도 그들에게 한 줌의 위안이 되었을지 잘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참 행복했었다. 치열하게 살 수 있었던 건 그만큼의 에너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 배터리의 에너지는 내가 꾸역꾸역 채워 넣은 게 아니라, 수 없이 많은 다른 요인들이 채워 넣은 것들이었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괜히 불행한 척했던 게 부끄럽다.


 행복했다. 4년 동안. 다음 동네에서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은 늘 낯설고 무서운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 처음 다음에 오는 게 어떤 것인지 이제 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일깨워주었다. 고마운 사람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런 고마움에 힘입어, 이 동네에서 있었던 미워하는 마음들도 다 떨쳐내고 떠나려고 한다. 떠나기 전에 깨달아서 참 다행이다. 내가 행복했듯이 다른 사람들도 여기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게 어디든, 그저 머무르는 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입춘이라는데 눈이 온다. 마치 내가 이 곳에 처음 왔던 그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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