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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Feb 27. 2020

새로운 동네

이사를 했다.

 새로운 동네는 서울의 어느 끝자락이다. 프리랜서인 데다가 코로나 19 때문에 나갈 일이 없고, 또 없어야 하는 요즘이라 오래도록 집과 동네에 머물고 있다.


 내게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본가는 똑같은 동네에 있었다. 아버지의 '아이들은 동네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철학에 따라 우리 집은 같은 동네에서 조금씩 다른 아파트로 옮겼을 뿐, 절대로 그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끈끈한 동네 친구들이 있다. 이제 성인이라 다들 조금씩 멀어져도 충분히 만날 수 있으니!) 우리 동네는 가히 아파트 촌이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주택가와는 거리가 조금 멀고, 동네 이름 앞에 '신()'자가 붙는, 오로지 사람들의 거주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동네였다. 집집마다 소득 수준이 비슷하고, 생활 방식이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평범하디 평범한 곳이었다. 그 동네에서 중학교까지 똑같은 얼굴들과 매일 마주하며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옆 집 아줌마는 매번 자기네 주말 텃밭에서 길렀다는 싱싱한 채소들을 가져다주고, 106동 친구네 아줌마는 목욕탕 어벤저스의 정예 멤버라 매번 목욕탕에서 마주치고, 우리 학교 어느 학년의 어느 수업에 어느 준비물이 필요한지를 문방구 아줌마가 먼저 꿰고 있고, 분식집 아줌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반겨주시던 동네. 그런 동네였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될 무렵, 동네가 지겹게 느껴져 다른 동네에 있는 기숙사 고등학교에 원서를 내밀었다. 덜컥 합격하고서는 3년 동안 기숙사에서 지냈다. 부산의 전 지역에서 몰려온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충격적인 것인 줄 알았던 나에게 (우리 동네는 그게 가장 큰 이슈고 충격이었다.) 친구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때때로 함께 울지 않을 수 없는 가정사이기도 했고, 한 번도 들어보지도 겪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유희의 세계이기도 했고, 살면서 상상도 해보지 못한 세상의 바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외국어를 능통하게 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공부는 좀 못해도 세상을 능통하게 알고 있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모든 것에 울고 웃고 놀라는 나를 친구들은 '온실 속의 화초'라 불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했다. (물론 내가 재벌 3세라든가 그런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기숙사는 안전했고, 걸어서도 바다까지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야자를 빼먹고 친구들과 바다에 갔고 학원에 간다고 속이고 심야 영화를 보러 다녔다. 담을 넘어 학교를 탈출하고 고작 향하는 곳은 치킨 집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 내가 부산을 떠나 상경을 하고, 대학을 다니면서 자취를 했다. 그때는 또 학교 생활이 바쁘고 빠르게 학교에 섞여 들어가면서 크게 뭘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어차피 기숙사 생활도 3년이나 했고, 1년 정도 친구랑 살기도 했고. 그냥 부모님과 같은 지역에 있지 않다는 것이 조금 걱정스럽고, 처음 하는 자취라 어떻게 살림을 꾸려가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고 그랬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전히 부모님은 물리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내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보내주고 계셨고, '학생'이라는 신분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보호막이 되었다.  어디를 가든 '자취하는 학생'이기에 챙김 받았다. 어른들은 내 앞접시에 고기 한 점이라도 더 올려주려고, 내 주머니에 만원이라도 더 찔러주려고 안달이었다. 혼자 있는 방이 외로우면서도 못내 안심되어서 매일 밤을 잘 보낼 수 있었다. 학교 앞이라 동네도 안전했다. 번화가가 눈 앞에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새벽에도 번쩍번쩍한 네온사인들 사이에서 나는 꽤 쉽게 살았던 것 같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동네들이다. 나는 대부분 안전하고 정이 넘치고 내 사람이 많다고 느껴지는 동네에서 살았다. 물론 처음부터 다 내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겠으나, 이미 아주 어릴 때부터 나를 알고 있던 사람들, 혹은 '학교'라는 매개에 함께 묶인 사람들 등 내가 의도해서 만들어낸 사람들은 아니었다. 시간과 상황이 힘을 합쳐 만들어 준 사람들이었지. 그런데 이 동네는 그렇지 않다. 가까운 거리에 친한 친구가 이사를 오긴 했으나, 그 친구를 제외하면 정말이지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사를 오고도 아직 적응이 덜 되었다. 얼마 전에는 정말 울고 싶은 날이 있었다. 옵션 가구를 설치해주겠다던 기사님이 연락도 없이 가구만 달랑 집 문 앞에 두고 가고, 같은 층에 사는 사람이 그걸 우리 집 현관문 바로 앞에 밀어 놓는 바람에 집에서 나올 수가 없어 고생하고, 겨우 전입 신고를 하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폐가구 스티커를 사려다 불친절한 대우를 받고, 풀 죽어 서있던 횡단보도 앞에서 어떤 남자에게 (분명 다른 길이 있었음에도!) 굳이 어깨빵을 당해 치이고, 집으로 가는 길이 헷갈려 길을 잃어서 3분 거리를 20분 넘게 빙빙 돌고, 집 건물 1층 현관을 못 열어서 10분 동안 기계와 씨름을 했다. 이 모든 게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동네에서 의지할 곳도 없어서 할 수만 있다면 엉엉 울고 싶을 만큼 서러운 날이었다. 내가 괜히 여기에 이사 와서 고생하는 것 같이 느껴지던 때. 말하자면, 모든 '처음'에서 느끼는 낯설고 무섭고 괜히 속이 메쓱거리는 그런 날이었다.


 그래도 그런 날이 지나가고 나니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여기저기 동네를 둘러보는데 참 이제껏 살던 동네와는 다른 곳이구나, 하는 게 느껴졌다. 이 동네의 대부분은 1인 가구 거나 아이가 없는 부부 거나 결혼하지 않은 커플이거나 그렇다. 다들 직장인이라 이른 아침 출근하고 저녁때쯤 돌아온다. 회사가 근처에 많아서 이른 아침과 점심시간에만 동네가 조금 활기를 띤다. 사람들이 출근하고 나면 노인들의 시간이다. 느릿느릿 어딘가를 향하는 노인들, 종종 '대학생인가?' 싶은 사람들이 그 사이에 보인다. 조금 걸어 나가면 옆 동네 아파트에 사는 주부들을 마주친다. 저녁과 주말에는 추리닝을 입은 사람들만 눈에 띈다. 직장인들이라 쉬고 싶은지 아니면 놀러 갔는지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웃지 않는다. 어딘지 힘들어 보이고 쉬고 싶어 보인다. 큰 소리도 잘 나지 않는다. 사람이 사는 곳이지만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기도 하다. 저녁에는 곳곳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지친 표정이다. 표정은 비슷하지만 사람들은 다 다르다.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마을버스 없인 아무 데도 못 가는 사람도 있다. 가끔 낮에 같은 건물에서 사람을 마주치면 같은 프리랜서인가 싶어 반갑기도 하다. 원룸도, 투룸도, 아파트도 공존하는 동네다. 월세도, 전세도, 매매도 있다. 수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섞여 '남'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 곳은 참 적적하다. 서울은 정이 없다고들 하는데 정이 없다기보단 여유가 없다. 서울에 처음 살아보는 것도 아닌데 이런 동네는 처음이다. 생기를 찾아보는 게 참 어렵다.


 이 동네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최근에는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많은 친구들이 집들이 겸 찾아와 주어서 외롭지 않게 잘 보낼 수 있었다. 이번 주말에는 부산 가족들이 올라온다. 이 집에서 앞으로 친오빠(라쓰고 호적 메이트라 읽는다.)와 함께 살아야 한다. 동네에 적응도 제대로 못했는데, 가족들과 떨어져 산 세월이 이렇게 긴 내가 이 동거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충분히 많은 것들이 달라졌는데 더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속이 더부룩해진다. 새로운 동네, 잘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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