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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5시간전

공백을 애정할 수 있을까


나는 약간 강박적인 성향의 소유자다. 수업을 계획할 때 분 단위로 활동을 고려한다. 첫 번째 활동은 이 시각에는 마무리 해야 하고, 두 번째 활동에는 이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고, 수업 내용을 요약하며 마무리하는 시간, 학생들이 자기 자리 주변을 정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수업 시간 내내 학생들을 지도하는 동시에 시간을 분 단위로 확인한다. 수업이 종료된 시점에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안도감이 든다.


정리 정돈을 할 때도 강박 성향이 살짝 드러난다. 물건이 원래 있던 자리에 있지 않으면 불쾌하다(가끔 남편은 물건을 쓰고 나면 제자리가 아닌 사용한 곳 어딘가에 올려둔다). 반찬통의 높이를 가지런히 맞추고, 컵 크기와 기능을 구분하여 배열할 때 뿌듯함을 느낀다.


최근에는 마스킹테이프를 사서 일기장, 독서장으로 쓰고 있는 미도리노트를 리폼했는데, 패턴의 오와 열을 맞춰서 딱 맞게 붙이는 데에서 굉장한 희열을 느꼈다. 내가 몇 번이고 떼었다 붙였다 하며 미세한 간격을 조절하는 걸 남편이 지켜보더니, “강박적이야..”라며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경계선이 보이지 않게, 선에서 면으로.


기록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기장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 한 페이지에 빈틈없이 꽉, 채우고 싶어진다. 줄이 애매하게 남는 건 견디기 어렵다. 쓸데없는 사족을 붙여서라도 그 줄을 메꾼 적도 있다. 며칠간 일기를 쓰지 못했다면 빠진 날짜가 신경쓰여서 과거로 거슬러 단 몇 줄이라도 꾸역꾸역 날짜를 빈틈없이 채워야 마음이 편안하다.  


스스로 이런 사람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빅토리 노트’를 읽는 걸 오랫동안 망설였다. ‘빅토리 노트’는 육아일기 책 추천을 요청하면 빠지지 않고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책 중 하나이다. 엄마가 두 아이에게 각각 5년간 육아일기를 썼고, 그 일기장을 성인이 된 자녀에게 선물해주었다는 코끝이 찡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도 이렇게 육아일기 써서 선물해주는 엄마가 될 거야!’라며 자극을 받을 게 분명했기에 읽는 것을 미뤄왔다. 내가 과연? 육아를 하면서 매일 일기를 쓴다고? 심지어 5년 동안?? 어림도 없지.


그냥 어떤 책인지 궁금하니까 읽어보기만 하자는 마음으로 펼쳐 본 책에서 예상치 못한 부분을 발견했다. 일기의 시작이 이렇게 반복되는 것이다.


“웬일인지 일기를 오랫동안 걸렀구나.”

“두 달 가까이 기록을 안 했구나. 엄마가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일기를 너무 거른 것 같다.”


아, 꽉 채운 5년이 아니구나? 중간중간 비어있는 기간이 꽤 길었구나. 듬성듬성 적혀진 일기라는 점이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공책의 줄을 꽉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 힘들고 지친 시기는 그냥 쓰지 않고 공백으로 두어도 괜찮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기록하겠다는 마음을 끝까지 이어가는 것. 육아일기가 아니더라도 내 일기 생활에 실천해 볼만하다. 나에게 너무 박하게 굴지 말고. 모자라다고 타박하지 말고. 공백을 바라보는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을.



‘바라건대 이 책을 읽은 어느 엄마가 자신의 아기에 대한 육아일기를 써준다면 나의 이 책은 누군가에게 씨앗이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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