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소리

눈 내리는 소리를 다시 들었다.

by 정희권
KakaoTalk_20260203_234701898_01.jpg 눈이 오는 마인강 전경

늦잠을 자다가, 눈을 치우라는 아내의 말에 졸린 눈을 비비고 서둘러 나섰습니다. 독일 와서 처음 보는 장관에 입이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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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60203_234701898_06.jpg 정원도 온통 눈으로 덮였습니다.


이곳 기후은 가을 겨울에 비가 많이 온다는 것만 빼면 우리가 떠나온 부산과 비슷합니다.

비교적 따뜻하지만 겨울은 차갑고 습기 차 우울합니다. 가끔 눈이 오더라도 땅에 닿을 때쯤에는 대개 녹아버립니다.


눈이 잠시 뜸해지자 진입로와 차 위의 눈을 쓸었는데, 곧 함박눈이 흐벅지게 다시 내리기 시작합니다.

시야가 가릴 정도로 쏟아집니다.

골목에 나와계신 이웃 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이 마을에 이 정도로 많이 오는 건 20년 만이야.


아주 예전에는 이곳에도 눈이 많이 왔을 것 같습니다. 인근에 아직도 리프트가 그대로 남아있는 과거 스키장이었던 곳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동네아이들이 사랑하는 장소였겠지요. 그들을 쇠락하게 만들었던 자연의 변덕이 오늘 다시 눈을 불러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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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6_103845.jpg 잠옷입은 아들도 내려와서 눈을 씁니다.

진입로를 내고, 저희와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의 차 위의 눈까지 쓸어냈지만,

다시 또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아까보다 더 거세집니다.

쓸어낸 곳에 또 금방 하얗게 쌓입니다. 이 정도면 눈을 쓰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화가 나지 않습니다. 너무 아름다우니까요.

눈 쓰는 일을 포기하고 눈 내린 마을을 구경하러 나서기로 합니다.

제 생각도 목적 없이 같이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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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마을은 소도시에서도 다시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운이 좋으면, 밤에 여우나 사슴이 지나가는 것도 볼 수 있지요. 야생 토끼와 고슴도치는 더 흔히 보는데 집에서 키우는 애완용 보다 꽤 큽니다.


마을에는 음식점 두 개, 겨울에는 닫는 아이스크림 카페가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꽤 사랑받는, 맛있는 아이스크림 카페를 운영하는 이태리 가족들은 겨울에는 문을 닫고 따뜻한 자기 나라로 갑니다. 저는 세상에서 아이스크림집 하는 이태리인들이 제일 부럽습니다.

동네 토박이 형님 말에 의하면 그 아이스크림 집 아들은 왕년에 사고를 많이 쳐서 부모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배 나오고 맘 좋은 동네 아저씨일 뿐입니다.

여름에 저희 집 막내 꼬꼬마 녀석은 학교 갔다 오는 길에는 용돈으로 꼭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 사 먹는데

맨날 찾아오는 막내가 귀여웠는지 항상 한 스쿱을 더 얹어 주십니다.


이 일대 도시들은 모두 Spessart라는 이름의 거대한 숲과 마인강이라는 작은 강을 끼고 생겨났습니다. 안데르센이나 그림동화 속의 숲은 바로 Spessart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빨강망토과 그를 노리는 늑대도, 길 잃은 헨젤과 그레텔 발견한 과자로 된 마녀의 집도 이 숲에 있었습니다. 백설공주의 이야기는 Lohr라는 소도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성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 광활한 숲은 도망친 용병이나 도적 때가 창궐한 곳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마인강가에 모여 마을을 만들고, 마을과 도시 간의 운송을 이 강에 의존했습니다. 이 강은 게르만과 로마세력이 만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한쪽으로 빗물이 흐르도록 해서 걷는 사람을 배려한, 일일이 돌들을 박아서 안전하게 만든 오래된 도로들은 고대에 로마사람들이 남긴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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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외곽에 크고 유일한 마트가 하나 있습니다. 여기를 나가 차로 한 십 분 정도 가면 시내가 나옵니다. 작은 도시지만 영화관과 큰 병원, 그리고 제가 애정하는 50년 넘은 역사를 가진 운치 있는 콘서트홀도 있지요.


작은 도시지만 그 콘서트홀은 연중 공연스케줄로 가득 차 있는데, 어느 날 공연 포스터에서 필콜린스의 이름을 보고 저는 눈을 의심했습니다. 의심하길 잘했습니다. 'Feel' Collins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동네 너훈아 형님 되시겠습니다.


동네 헤비메탈 밴드도 있습니다. 고약한 표정을 짓고 사진을 찍은 검은 반바지에 멜빵차림 아저씨 둘은 어디서 많이 본 것도 같은데, 검은 바지가 바이에른 특유의 세무바지라는 점이 다릅니다. 밴드 이름은 AB/CD입니다. 헤비메탈을 좀 아시는 분들이라면 그 형님들이 뭘 연주할지 바로 알아차리실 겁니다. 무대에선 아마 천둥소리가 나겠지요.


오랜 역사 때문에 이곳을 사랑하는 뮤지션들이 있다고 합니다. 탑스타는 아니지만 분명 한때 유명했던 뮤지션들이 어떻게 사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이곳에서 풀렸습니다. 마이클잭슨과 함께 공연했던 쥬디스 힐이나, 딥퍼플의 창립멤버 이언페이스의 이름도 여기서 보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들은 어딘가에 항상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찾기 어려웠을 뿐. 독일에 온 첫해, 저는 이곳 작은 콘서트홀에서 리 릿나우어 공연을 직관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인생 최고의 공연 중 하나였습니다.


목표도 생각도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아 집으로 향하는데, 마을에 하나 있는 성당 앞에 어디서 많이 본 녀석이 눈을 굴리고 있습니다. 눈치우던 막내가 친구를 불러 눈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눈사람이 정말 큼직합니다.

한참 본격적인 사춘기가 찾아왔지만, 아직도 아이인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천성이 다정한 귀염둥이로 태어난 놈들은 삐쭉빼쭉한 시기가 찾아와도 어쩔 수 없는 몽실몽실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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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눈에 나뭇가지만 꽂았길래 눈사람의 디테일을 주기 위해 야채를 좀 갖다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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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토마토와 당근으로 얼굴을 만드는 꼬마들에게 신체의 다른 부분을 묘사하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눈사람은 독일어로 Schneemann이고 관사는 남성인 Der가 붙으니 방울토마토 두 개와 당근 또는 고추를 적절한 위치에 잘 박아놓으면 사람들이 관사를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꼬맹이 둘은 제 의견을 빠르게 각하했습니다.

요즘 애들에 대해 걱정들이 많으시지만 제 생각은 요즘애들이 저희가 그만할 때보다 훨씬 순수하고 착하다는 것입니다.


Gemini_Generated_Image_v7u7vxv7u7vxv7u7.png 기념촬영을 하는 아이들

눈사람이 정말 크다고 생각했는데, 사진 속 아이는 그 눈사람보다도 훨씬 큽니다.

품 안에 쏙 들어오던 귀여운 막내는 벌써 저를 내려다보는 키로 자라났습니다. 이곳 애들은 독립이 빠릅니다. 아이들이 우리 옆에 남아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저에게 안아달라고 팔을 벌리던 큰 아이는 이제 슬슬 독립을 꿈꾸고 있습니다. 막내도 멀지 않았습니다.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강가로 나섰습니다. 집들 사이로 강가로 나아가는 소로가 있습니다.

예쁘고 작은 이 강은 뉘른베르크에서 운하를 지나 저 머나먼 헝가리 다뉴브 강까지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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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는 발자국뿐, 아무도 없습니다. 눈은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원래 조용한 마을인데, 차도 사람도 다니지 않으니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눈은 내릴 때 소리가 납니다. 다른 소리에 묻혀서 우리가 흔히 듣지 못할 뿐입니다.


처음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은 것은 제가 아직 20대가 되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대학입시에 떨어진 저에게 아는 스님이 운영하시는 절에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아머지가 권해주신 팡세라는 책을 들고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고 도착한 작은 절에 머물렀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약간의 절망,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들이 마음속에 있고 스마트폰은 없던 시절, 백열구를 벗 삼아 밤에 혼자 산속 절방에 앉아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한 부드러운 소리. 아무 소리가 없는 산속이라서 들려온 소리 없는 소리 조용히 눈이 쌓이는 소리였습니다. 날씨는 호되게 추웠지만, 저는 미닫이 방문을 열고 조용히 마당에 쌓이는 눈의 모습과 소리에 집중했습니다.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고, 이름 지을 수 없으나 확실히 존재하는 감정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30여 년이 지났습니다. 몇 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참 많았고, 앞으로의 일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 예상하지 못한 변화들이 저와 가족들을 독일로 이끌었습니다. 5년 전에 저는 우리 가족이 독일에서 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은 다 이해하거나 예측하기 어렵고 어쩌면 이 눈조차 이상기후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눈은 아름답고, 아이들은 쌓인 눈을 가지고 눈사람을 만들며 좋아합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눈은 소리를 내며 내려서 아름다움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목적 없이 걸으며, 슬픔도 기쁨도 아닌 이 이름 지울 수 없는 충만함을 아름다움과 함께 느끼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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