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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권 May 15. 2019

나이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마지막 40대의 언저리에서


언젠가는 내 사랑도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 황동규, 즐거운 편지

 

 

몇 년 전 불현듯 갑자기 깨달았다.  

이제 매우 높은 확률로, 내가 살아갈 날들이 이미 살아온 날들보다 길지 않다는 사실을. 그걸 깨달았을 때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덧 나는 나이를 먹은 것이다. 어른이 되려는 어떠한 준비도, 각오도 없이.

그런데 막상 나이를 먹어보니 내가 어리거나 젊었을 때 그토록 두려워했던 나이먹는 다는 것이 그다지 두렵지 않다. 뭐든 막상 맞서 보면 그런 법이다. 젊었을 때 그토록 두려워했던 나이에 따르는 책무도, 사실은 그것보다 더 두려워했던 외모의 변화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얼마 전 페이스북을 접속했는데, 그날의 타임라인에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언제로 하고 싶냐는 질문이 떴다. 별 망설임 없이 나는 '지금 이 순간'이라고 대답하고는 혼자서 만족했다. 물론,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기쁨, 쾌락의 크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컸던 때가 있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있어서 소위 말하는 그들의 황금기는, 직장생활을 시작해서 얼마간의 경제적 여유는 있으되 가정이라는 책무가 주어지지 않았는 시기가 이 닐까? 그때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내 인생의 어떤 단락은 자유와 욕망과 내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무언가가 만들어 내는 불안과 무책임 속에서 어딘가를 향해 간절히 나아가던 때였다는 것을 세월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때가 지금보다 행복하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다. 아니, 마치 타임슬립 물의 장르소설처럼 지금의 기억을 간직한 채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서 내가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아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아주 잠시 동안 나 답지 않은 시도를 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곧 매우 높은 확률로 과거 내가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멍청하고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를 거라는 사실도 확실하다. 아마도 별로 주저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 기뻐하기도 하겠지만 더 큰 절망을 맛보기도 하고 종국에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될 것이라거나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밖에는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며 거기에 만족할 것이다. 내가 나인 이상, 내 인생이 딱히 더 나아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냉정한 판단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 다시 사는 인생이 과연 이전의 삶과 달라질 것인지 여부에 무언가를 베팅해야 한다면 나는 냉정하게 크게 보아 큰 차이가 없을 거라는 쪽에 베팅할 것이다. 그러니 그때로 돌아갈 이유도 없다.

 

 꼭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이제는 예전보다 많은 것들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이다. 아가라는 선물이 찾아오니 세상 모든 어린아이들이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고(세상에 어린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내가 관찰한 바로는 그들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 자신이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커가니 이제는 중학생도, 대학생들도 귀여워 보인다. 아이들이 느끼며 발견하고 있는 삶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전해올 때가 있다.

 

 동백섬에 흐드러지게 피는 동백꽃을 어렸을 때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 꽃은 내게 한복을 입고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머리를 쪽진 여성을 떠올리게 했고 그건 내가 좋아하는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전거로 출근하던 어느 날  길에 활짝 핀 동백나무 앞에서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이렇게 예쁜 아이들을 왜 나는 몰라보았던 것일까?

한복을 입고 곱게 쪽진 모습은 그대로이지만 알고 보니 그 들은 아직 얼굴에 홍조가 가시지 않은, 주름 한점 없이 곱디 고운 여자아이들이 아닌가?

 

 얼마 전에 성숙이 다른 사람들보다 천천히 찾아오는 한 어린 커플을 보았다.  서로를 사랑스럽게 보면서 천천히 어루만지는 모습은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을 행복하게 했다.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자신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는지 그들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말과 행동이 느렸던 그들의 불꽃은 때로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와 방식으로 타오를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평생 다시 마주치지 못할 것이지만, 그들의 불꽃이 가능하면  오래 지속되고 언젠가 꺼지더라도 따뜻하고 기쁜 자욱을 남기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모습 자체가 내게 기쁨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 주위의 이런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들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미 지난 일들에 감사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받아들이려 한다. 어려서는 하지 못했던 생각이다.

두려움이 의미 없다는 걸 알기에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지 않다. 한때 내 마음을 저 높은 곳에 올려놓고 흔들거나 땅바닥에 패대기쳤던, 그러나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아이들처럼 지나간 일들이 아쉽지 않다. 되돌릴 수 없는 지난 일에  1초도 시간을 쓰고 싶지 않고, 돌이킬 수 없이 내 주위를 지나는 것들을 지켜보고 싶다. 그리고 나날이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지금 내 마음을 달뜨게 하는 것들도 사라지거나 의미 없어질 날이 오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우리 집 아침,  일찍 일어나 거실에 앉아 있으면, 눈을 비비며 아장아장 걸어 나와 안아달라고 두 손을 번쩍 들던 예쁜 아이들은 세월이 벌써 어디론가 데려가 버렸다. 아직도 가끔 늦게 귀가한 나는 잠든 아이의 볼을 만지며 아빠의 심박수를 내려가게 했던 아가의 살 냄새를, 주근깨 하나 없던 보드라운 아이의 흔적들을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알고 있다. 아이들을 어떻게 기르는 것보다 어떻게 자신의 세상으로 떠나보낼 것인지가 더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가능하면 눈 깜빡거리지 않고, 나를 스쳐가는 순간들을, 이 예쁘고 변하는 것들을 지켜보고 싶을 뿐이다. 가능하면 그것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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