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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권 Feb 05. 2018

고백

남기고 싶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

먼 나라에 출장 와서

그래도 하루 한번은 통화를 하려 하는데

아내와 영상통화를 하는 동안 얼굴을 비치며 인사하는 놈은 이제 막내 뿐이다.

1호와 2호는 뭐하고 있냐고 하니 친구와 게임을 있다고 한다.

그래, 게임으로 먹고 살아 온 아빠는 누구보다 그걸 잘 이해하는,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다.


포기해야 할 것에 연연하지 않는 나이가, 사람이 되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리운 풍경이 있다.

퇴근을 하고 오면, 가장 먼저 눈치를 챈 녀석의 '아빠닷' 하는 소리와 함께

층간 소음을 걱정하게 만드는 다다닷 하는 발소리들이 들리곤 했다.

신발을 벗으면 (때로는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한놈은 오른쪽 발을, 한놈은 왼쪽 발을 껴안고 앉아 아빠가 끙끙거리며 움직이게 만들고 있으면 막내가 뽈뽈뽈 기어오는 것이다.

1호와 2호의 엉덩이를 왼팔, 오른 팔로 받치고, 막내를 깍지낀 손에 앉히면

세놈을 한번에 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꼬맹이들에게 얼굴을 비비면 지금 이 순간도 선연한 아가들 살냄새가 났다.

 아내는 허리 다친다고 질색을 했지만 무겁지 않았다. 정말로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출장을 다녀오면 항상 가장 걱정이 되던건

'아, 내가 못보는 사이 불쑥 커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지금까지 내가 어디 다녀온 사이 아이가 불쑥 커버려서 아빠를 서운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확인 할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쌓여온 변화는, 내 귀염둥이들을 어디론가 데려가 버렸다.

어느 사이엔가, 아이들을 한번에 안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일찍일어나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문을 조금 열고 거실에 아장아장 걸어나와

눈을 비비며 안아달라고 두손을 벌리던 우리집 첫번째 아가 제법 살집이 잡힌 초등학교 최고학년이 되었다. 엄마는 이제 안아줄 수도 없을 것이다.


항상 조용하고 다리에 힘이 없어 잘 넘어져 툭하면 얼굴에 멍이들던, 엄마아빠를 걱정시키던 둘째는 수시로 엄마 아빠가 다른집 부모들에게 사과전화를 하게 만드는 터프가이가 되었다.

 이제 초등학교를 들어가는 막내도 언제까지 사람들 품에 잘 안기는 예쁜 귀염둥이로 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가는 세월을 잠시라도 남기고 싶어 사진으로, 비디오로 아이들의 모습을 담지만

그 아이들이 그 또래에 내게 어떤 존재였던 가는

내 기억속에서 꺼내 남겨놓을 방도가 없다.

훌쩍 자란 아이들의 모습속에서 어린 시절의 천사들은 그 흔적만 남을 것이다. 거칠고 드세진 목소리 안에서 아빠를 처음 부르던 귀여운 목소리가 주던 감동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 심박수를 떨어뜨리던 그 예쁜 살냄새는 이제 남의집 아기들을 볼때나 흔적을 발견하거나, 먼 세월이 지나 다시 나를 닮은 또다른 작은 녀석들을 볼 때나 가능하리라.

 언젠가는 다들 아빠 엄마를 떠날 것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내가 세명의 아이를 키우며 놀란것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에는 일종의 무늬나 결과 같은 것이 있어 사랑은 그 깊이와 크기가 아닌, 질감과 향기, 색깔과 같이 서로 다른 종류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세 아이를 볼때 느끼는 감정이 전부 다르다. 실제로 새로운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내가 느낀 것은, 그 과정이 내 안에 있던 새로운 감정의 결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모든 부모가 동일하게 느끼는 감정일텐데,

첫째 아이경이로왔다. 내 존재 전체를 압도하는 경이였다. 희한하게 나를 닮은 녀석,

모든 부모가 느끼는 감정이겠지만, 언덕을 오를때는 마치 돌아가신 할아버지 처럼 뒷짐을 짓는  모습은, 내가 편재하는 듯한, 일종의 기시감과 함께 묘한 감동을 줬다.

자신의 아이를 삶의 이유라고 말하는 것은

나 자신이 나의 삶의 이유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고, 어쩌면 영원회귀의 개념과도 가깝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아이안에서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잡한 층위들 모두에서 같은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은 자는 아이를 안고, 옆 얼굴에 귀를 대고  고개를 파묻고 눈을 감고 가만 있을때가 있었다. 누가 뭐 하느냐고 물었다면 나는 내 아이를 감상하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내 손으로 무게를 느끼고, 왼쪽 귀로 아이의 체온을 느끼고 쌕쌕 거리는 소리를 듣고, 아이의 체취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일찍 뭔가를 가르쳐볼 시도를 하기도 했다. 미국의 출판사가 만든, 유아들에게 기본적인 도형과 숫자 개념을 알려주는 책을 사서 보여주면서 뭔가를 가르쳐볼 시도를 하기도 했던  초보 아빠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아이가 집중을 못하거나 이해를 못해서가 아니라, 아빠가 그걸 계속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골똘히 생각을 하거나 똘망한 눈으로 아빠를 쳐다보면서 뭔가를 물을때면,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공부는 떼려 치우고 안아서 볼을 부비거나 뽀뽀를 해주거나 등을대고 누워서 아이를 하늘높이 올려주는 놀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큰 아이에게 힘든 시간은 둘째와 함께 왔었던 것 같다. 잠자는 갓난아가를 보며 예뻐하던 첫째의 모습도 기억나고, 아가를 꼭 안아주면서 웃던 천사같은 모습도 기억나지만, 둘이 커가면서 메몰차게 둘째의 물건을 뺐고, 때리고, 꾸짖는 모습은 부모, 특히 엄마의 스트레스가 됐고, 그 미움은 부모를 거쳐 다시 돌아와 첫째가 야단맞고, 때로는 매를 버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래, 본디 사랑을 누군가와 나눠 가진다는게  사실은 불가능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생명이란걸 태어나게 만들고 인간이란걸 만든 이 기묘한 우연의 조합들이 우리에게 그걸 강요할 뿐이지만, 사랑의 부재를 인내하고 사랑을 나눠가지라는 주문에 따르는 일이 사실은 불가능 한 일이란 것. 아빠도 잘 안다. 사실은 나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동생들은 그만 때렸으면 좋겠다만.


집안의 첫번째 어린 아이로 한동안 온 집안의 귀염둥이였던 사촌형 이후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아이로, 집안의 장손으로서 온 집안 사람들로 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첫째지만, 강물을 흐르게 만들고 씨앗의 싹을 티우는 시간이란 놈은 천사같은 귀염둥이를 가끔은 어른들을 정말 화나게 만드는 천방지축 개구쟁이로 만들어 놓았다.   

 

 아빠 역시 너무나 화가나 매를 들 때도 있지만, 아빠가 자기 자신을 미워하듯이 미워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너를 사랑한다는 것, 지금까지 그래왔다는 것을 언젠가 첫째가 깨닫는 날이 오면 우리가 좀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빠는 다른 사람이 아빠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지 않고 더구나 너에게 이해를 구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는다면 기쁠 것이다. 특히 그게 너라면 더더욱 기쁘리라.


첫째에 대한 사랑이 자부심, 편재하는 나 자신에 대한 자기애와 같이, 벗어날수 없는 중력같은 것임에 반해

둘째는 아주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부분이 있는데, 그 끌림은 애잔함, 애틋함과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둘째가 3살, 첫째가 다섯살 쯤 됐을 때 언젠가 사진하나를 보여주면서 아내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 이거 보면서 뭐 느끼는 것 없어?"

벤치에 떨어져 앉은 첫째와 둘째의 사진이었는데

첫째가 음료수를 혼자 먹고 있는 동안 둘째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서 한병을 먹을 수 없는 아이들이라 나눠 먹으라고 하나를 사줬는데, 그것은 어른의 생각일 뿐, 한명은 원하던 것을 가지고 한명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바라보는 것은 항상 둘째였고.


첫째의 존재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실제로 내가 집에오면 항상 자연스럽게 안고 얼러주는 것은 첫째였고, 둘째에게는 그런 사랑을 쏟아주질 못했다.


무의식 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나 스스로도 인식할 수 있었기에 언젠가는 이런 한탄을 하기도 했다.

'나는 충분히 저 작은 아이들을 충분히 양손에 안아줄 힘센 두 팔이 있는데, 왜 저 둘을 한번에 마음속에 품어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을 의식하고, 둘째를 많이 사랑해줘야지 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세월이 이미 많이 지나서였다. 지금은 내 마음속에서 그런 편애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 하지만, 그 상실의 경험은 둘째가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하는 방식에 묘한 흔적을 남겨 놓은 것 같다.  


둘째는 사랑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없다.

외할머니에게는 친할머니가 좋다고 하고

친할머니에게는 외할머니가 좋다고 말하는 이 묘한 녀석은 사실은 셋 중 누구보다도 더 사랑을 갈구하고 깊이 케어하면서도 그 마음을 잘 들키려 하지 않는다. 둘째에게 사랑은 자기 스스로도 꺼내놓기 두려운, 자기안에 숨겨놓은  무언가인 것이다.


둘째가 가장 좋아하던 장난은 어쩌면 둘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보여주지 않나 싶다.  


둘째는 아빠가 자기 눈을 가리도록 하고 눈을 감은채로 도로변 섬돌 같은것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위험한 장난을 좋아한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위험 안에서, 온전히 남에게 자신을 맡기는 순간을 행복이라 느끼는 것이다.


둘째는 사랑의 부재를 조용히 자신의 내면에 받아들이는 자 만이 풍기는 결락의 그림자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를 막론하고 여자들이 이녀석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걸 느낀 것은 둘째가 네살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또래 여자애 둘이 경쟁적으로 음료수를 뽑아서 둘째에게 주는 것을 본 이후인데, 나이많은 누나들, 아줌마들은  '둘째는 왠지 애틋하다.' 라는 표현을 공통적으로 한다. 자신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있겠지만.


항상 다정다감한 셋째와 구분되는, 여자들에게 불친절하면서도 동시에 인기가 좋은 둘째를 보다보면,  내가 남성으로서 오랫동안 가져왔던 '어째서 나쁜 남자가 인기가 좋은가?' 라는 의문의 답을 발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아빠는 말 하지 않아도 분명히 알고 있다.

둘째의 말은 거칠고 때로는 힘자랑이 대화를 앞설 때도 있지만, 사실은 형제들에게 자기가 가진 맛있는 음식을, 장난감을 제일 잘 양보하는 사람이 둘째라는 것을.

형제들과 함께 잠잘때, 결코 아빠 옆자리를 양보할수 없는 첫째와 셋째를 두고 누가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잠들었는지, 그리고 잠든 그녀석 눈에 눈물이 그렁 그렁 했다는 것도 아빠는 사실 다 알고 있단다.


아빠는 둘째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른다.

운동을 좋아하고 벌써 거친 남자의 싹을 보이는 둘째는 아마도 180 중반을 훌쩍 넘는 외갓집 남자들 처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크고 강한 남자가 될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위에서 둘째를 조용히 쳐다보는 어떤 아가씨는, 그런 둘째의 모습속에서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나 사랑을 갈구하는 어떤 아이의 존재를 느끼고 공감하거나 마음아파 할 것 이다. 그런 아가씨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 아이는 둘째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 눈에만 보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누군가의 귀한 딸일 그 아가씨가 우리 둘째에 어울릴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 눈에도 쏙 들어 환영받을 착하고 예쁜 아가씨이기를, 그래서 그 사랑이 영원이 이어지는 해피엔딩이기를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다.


두 형들과는  달리 막내에게 사랑이란건 굳이 끊임없이 존재를 확인받을 필요도 상실에 가슴아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누가 태어나기 전에

'사랑에 대해서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사랑은 원래 내가 알아서 받아내는거야 그 전에 먼저 많이 주면 되거든' 이라고 미리 가르쳐 준 것 같은 녀석이다.  


원래 의도치 않게 찾아온 손님이라는 뜻을 담아 이름을 지엇던  (신기한 것은 셋째가 생겼다는 사실을 제일 처음 눈치 챈 것이 임신테스트기가 아닌 첫째라는 것이다. 어느날 엄마 다리를 베고 있던 첫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엄마, 엄마 뱃속에 애기있어." 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네가 거기 있었다. 엄마 아빠에게도 정말 신기한 체험이었다.) 세째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키워야 할 지 막막 했지만,  

엄마말로는 공짜로 키웠다고 할 정도로 자기 일을 알아서 하고 붙임성도, 넉살도 좋은 귀염둥이로 자라줬다. 고마운 일이다.


아빠가 제일 신기했던 것은 셋째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었는데, 셋째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나 한다.


셋이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고는 천방지축으로 딸랑거리면서 뛰어나가는 형님들 뒤에서, 수건으로  욕실앞 바닥 물을 닦고 있는 세살짜리를 예뻐하지 않을 사람은 아빠 생각에는 없다.


하루종일 너희를 돌보는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밤늦게 잠깐 수퍼를 가는 엄마에게 "엄마! 친구 만나 커피한잔 하고 와도 돼" 라고 말하는 막내의 명민함은 아빠도 이나이 되도록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아빠는 셋째의 미래에 대해 아무런 걱정을 하고 있지 않다. 막내는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능력인, 남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능력을 처음부터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공부나 다른건 네가 하고싶은 만큼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첫째에게 사랑이란것이, 선사시대 부터 쌓여왔고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녹지않을, 만년설에서 기원한 끊이지 않는 수원에서 비롯된 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둘째에게 사랑은 사막 어딘가에 존재하는, 어딘지 위치를 확인할 수 없으니 분명히 존재하고, 그래서 그 사막을 건널 용기를 주는 오아시스 같은 것이다


 반면에 막내에게 사랑이란건 마치 결코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으면서도 파트너들을 언제나 행복하게 만드는 능수능란한 장사꾼이 거래하는 물건과도 같다.


똑같이 '사랑' 이라고 불리지만, 이 조그만한 세녀석에게 주는, 그놈들로부터 받는 사랑이란건 이렇게 근본적으로 결이 다른, 마치 함박눈과 싸락눈이 다르듯이,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렇게 말 하고 보니 넷째나 다섯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아마도 내가 몰랐던 네가지의, 다섯가지의 사랑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그건 멋질망정 내가 가볼 수 없는 길이다. 마치 온통 다이아몬드로만 이뤄진 조용하고 아름다운 죽은 항성 위를 걷는 것 처럼. 상상할 수만 있을 뿐 이제 갈 수 없으니 아빠는 그걸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하다.


바다표범에 쫓기며 차가운 바다를 가로질러

생선들을 잡아 오는 아빠 펭귄이

해변가에 모인 수천마리의 아가펭귄들 중에서

목소리 만으로 자기 아가를 구분 해 내듯이


수천 수만의 아이들 사이에 있더라도

아빠는 얼마든지 너희를 찾아낼 수 있다.

너희는 다 다르니까

너희가 다른만큼 아빠는 너희를 사랑한다

다르니까 사랑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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