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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권 Oct 02. 2024

지적 사기


편견을 갖고 사는 것은 좋지 않지만, 나는 한때 포스트모던 이란 이름으로 한참 잘 브랜딩이 되던 프랑스 현대철학에 대해서 20대 초반에 큰 편견을 갖게 되었다.  세월이 꽤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거기서 벗어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오히려 그 편견을 강화할 일만 자꾸 생긴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 때 개인적으로 경도 되어 있던것이 비트겐슈타인류의 분석철학이기도 해서 더욱 그럴 수도 있고,  (그는 언어를 응축하고 응축하여 글을 썼고, 그래서 그의 말은 마치 잠언처럼 읽힌다. 나는 짧은 문장안에 어마어마한 통찰을 담고 있는 그의 글이 정말 좋았다.) 



철학을 포함 공부(중국말로 쿵푸인 공부는 단순히 학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완성을 위한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 멋진 말이다.) 들의 목적이 공부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는 동양적인 수신론의 관점에서 나 자신이 벗어나지 못해서 더더욱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공부 라는건 하면 할수록 우리를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야만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는 옳고 어떤 의미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은 다 이해하려 하는 편이다.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한참 철학 공부에 관심이 있던 1990년대 초는 포스트모던 이란 말이 유행해서 포스트모던 이라는 사조의 패키지로 묶였던 현대 프랑스철학이 덩달아 유행했었다. 푸코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라깡, 데리다 의 책을 읽고 그를 인용하던 게 유행이던 시기다.  사실 나도 한동안 그런 흉내를 낼 때도 있었다. 난삽한 이론이나, 철학이 아닌 생경한 학문의 용어를 갖다 붙여서 얄팍한 생각 또는 개똥철학을 포장하면서 뿌듯해 하던 때가 있었다. 



훗날 보그병신체라 불리는 괴상한 어투와 쌍벽을 이루게 되는 인문병신체의 유행이 시작된 것도 이때 쯤인것 같다. 최근은 판교특유의 어체가 화제인 것 같다만. 



한동안 세상을 주름잡았던  프랑스 현대철학에 대한 의문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이 앨런소컬의 유명한 "지적 사기" 사건이다. 말도 안되는 엉터리 과학용어를 난삽하게 넣은 가짜 논문으로 그는 듀크대학에서 발행하는, Social Texts라는 학술지에  등재한다. 그 이후 자기 논문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스스로 밝힌다. 그가 비판한 대상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과학적 개념을 남용한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었으며, 라캉, 가타리, 들뢰즈,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이 주요 비판 대상이었다.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사건을 알게 된 것 외에도  철학을 공부하면서, 특히 번역본이 아닌 원전을 접할 기회가 많아진 것도 내 생각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예전에는 누가 어려운 글을 쓰면, '오 심오한 이야기다.' 라고 경외심이 들었는데,  지금은  지나치게 난해한 글을 보면, 일단은 번역을 의심해 본다.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번역하려면 난삽해 질 수 밖에 없다. 더더구나 글쓴이도 자기가 뭔소리를 하는지 모르고 쓴 글이라면 번역은 한층 더 모호한 것이 될 것이다. 



한동안 세상을 불쾌한 방식으로 떠들석 하게 만들었던, 윤김지선의 남혐논란 논문같은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논문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그 글은 남혐이나 명예훼손 논란 외에, 과학적 개념을 저열하게 남용했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남혐이슈야 백번 양보하여 학자 본인의 소신이라 해도, 그 논문은 최소한의 공신력이 있는 학술지에 실려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하도 논란이 되니 해당 논문을 구해서 읽어 봤는데,  남성을 벌레로 비유하고, 한국 남자는 한남충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생물학의 용어를 사용하여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그 용어도 알고보면 별 뜻도 아니다. 생물학용어에 생소할 수 밖에 없는 철학커뮤니티 안에서나 적당하게 생경하고 마치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을 뿐이다. 생물학 용어의 어줍짢은 차용은 그것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게 그 글이 마치 무슨 깊이를 갖춘 것처럼 호도하는 아주 얄팍한 수작이었다. 윤김지선 이사람도 역시 프랑스에서 현대철학 전공으로 석, 박사를 한 사람이다. 거기까지 가서 뭘 하고 온 것인가?  



철학연구회 같은 학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의 가치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결국 등재를 결정짓는 피어리뷰의 공정성인데 철학연구회에서는 그 논문의 리뷰조차 공개하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으리라. 학자의 간판을 걸고 그런 글을 철학 논문으로 인정했다는걸 어떻게 떳떳히 밝힐 수 있겠나? 결국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철학등재지였던 철학연구회는 연구실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학회지로 강등되었었는데, 몇 개월 있다가 소리소문 없이 다시 복귀 되었다. 거기다 논문을 써서 내야 그걸 실적으로 인정받아 자리를 보전하고 월급도 받는 교수들의 노력 덕분 이리라. 그저 가련한 일이다. 



나는 그때 철학자입네 하면서 그 사건에 침묵하는 사람들이 정말 한심했는데, 그래도 양심있는 사람이 소수는 있어서 교수신문의 지면을 통해서 관련 논쟁이 잠깐 있었다. 


‘윤지선 논문’ 논란, 철학연구회는 무엇을 놓쳤나 - 교수신문 (kyosu.net)


난삽한 언어로 세상을 현혹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자칫 홀리기 쉬운 사람들에게는 복잡성에 대한 리차드파인만의 설명이 도움이 될만 하다. 그는 자연의 기본 법칙들은 단순하며 복잡성은 이를 설명하거나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런 종류의 복잡성과 진리를 감추고 호도하며 때로는 저열한 욕망을 감추기 위해서 등장하는 복잡성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의 글이나 말을 유심히 관찰하면,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는걸 파악해서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렵거나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면, 화자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도 유의미한 전략이다. 그런 사람들은 정규분포의 끄트머리처럼 언제나 존재할 것이니 우리 스스로 걸러내며 살도록 노력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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