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계단

평생 데리고 다녀야 할 지난 날들

by ezra

언제든 곁에 있더라도 관심이 없으면 눈에 띄지 않는 물건들이 있다.

책상 아래 발이 닿지 않는 곳에 그림자처럼 숨어 있거나,

옷장 위에서 먼지에 덮인 채 널브러져 있거나.


그러나 그런 물건들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기회는 창조주가 우리들의 시간 속에 아주 작게 심어 놓는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사소하게나마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겪게 되는데, 나의 경우는 그날따라 눈에 띈 카세트 플레이어의 전원을 켜본 일.

그리고 뺄 수 있는 한 최대로 길게 안테나를 빼고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이리저리 주파수를 맞춰 보았다.

어른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라디오에 열세 살 어린이는 빠져들었고,

처음에는 바로 정면에 보이는 천장에, 그리고 나중에는 커튼을 걷고 아파트들이 가리고 가리다 만들어낸 조그만 밤하늘에 DJ가 읊는 글들을 채워나갔다.


깊은 밤이나 새벽이 꺾이는 때의 라디오가 가진, 사람들을 달래는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글들에 익숙해졌고

그 즉시 그것을 동경해 일상을 녹여내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계는 가벼워졌고, 나도 무거운 카세트 플레이어는 벽장에 집어넣고 전자사전이나 MP3로 라디오를 들으며 가볍게 몸을 뒤척일 수 있었다.

바뀌는 기계 따라 꿈꾸는 글의 모양은 바뀌곤 했지만 일상에서 문득 치밀어 오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단 욕구는 여전하다.


내 오랜 꿈의 증거물로 집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공책 속에 내 과거의 고민과 다짐이 들어 있다.

공들여 생각해낸 단어 하나하나가 내 것인, 여기 그 글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 익숙해 그림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키가 작고 어려서인지 그녀의 춤이 더 짜릿했던 무용수처럼 어린 마음이 비친 일기는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았을까 싶을 정도로 쉽지 않다.

그 계단 같은 글들이 헛되지 않았었다고 숨차게 소리 질러줄 날이 있으면 좋겠다.

가끔씩 떠오를 정도로만 원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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