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지 못하는 시간, 막지 못하는 마음

by ezra

매년 그렇듯 아직은 쌀쌀한 3월 끝무렵이지만

내가 원하는 따듯한 봄은 옷을 껴입음으로써 불러냈다.

봄이 더 시끌벅적해지기 전에 바닷가를 걷고 싶었기에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분명히 바다를 마주한 경험은 많다고 할 수 없지만,

결코 적지는 않았다.

그런데 바로 내 머리 윗 하늘에서

서로 부딪힐 듯 많은 갈매기들이 내는 소리는 처음 들었고,

이내 이전 경험들은 꺼내지 못할 것들이라고 여겨졌다.


어디로 숨었는지 보지 못한 해가 사라지고,

여기저기 다른 조명들이 떠올라 그 빛을 대신한다.

반대편 해안가에 줄지은 가로등과 건물이 내는 빛이

맞닿아 있는 수면에서 저 깊이까지 색을 칠했다.

말간 물에 떨어뜨린 한 방울의 선명한 액체가 그럴 것처럼.

다만 그 빛은 비친 것뿐이라 끝까지 섞이지 않고

일자로 뻗은 채 멈췄지만.

발바닥을 수면 위에 두고 머리를 수심 깊은 곳으로 향해두면

우리가 숨 쉬는 곳과 똑같은 세계가 펼쳐 있을 듯이

바다는 그것들을 선명하게 담아두고 있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일이 없는 그런 바다는 내게 너무 예뻐

시린 손은 어쩌지 못한 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떠오른, 낮에 본 얼굴에 하얀 분장을 했던 사람.

옆에 담요 한 장을 두른 여자를 앉혀두고 엿을 팔던 아저씨.

그가 건네는 말에 어떻게 응해줘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으며 지나치는 내 등 뒤로

그가 자신의 늙어버림을 비탄하는 말을 새겼다.

어쩌면 그것은 각설이들의 흔한 레퍼토리 일지 모른다.

매일 말하고, 누구에게나 말하는 이야기라 그는 더 이상 아릴 마음도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언젠가 혹은 매번 쓸쓸할 그 사람의 심정이 전해졌다.

그의 앞 가판대에 놓인 엿처럼 끈적하게 내게 달라붙던 탄식.


시간은 길지 않다는 걸 아예 모르고 살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은 실감을 못하는 건지 엉망진창이다.

서점에서 손수 골라서 한 장 한 장 조심히 넘기던 책도

무심코 던진 귤껍질에 종이가 짓이겨 버리면

그때부터는 막 대하곤 하는, 항상 그런 식이다.

그렇게나 졸라서 다녔던 학원들도 마음에 안 드는 한 명만 발견하면 그만두던 내 방식이

그때는 여유가 있어서 그런 거였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원래 내 타고난 방식이었나 보다.

완벽해 보이던 일 가운데 조금만 수틀리면

시들해지는 것의 반복.

지금도 내 시간의 틈 속에 무언가가 짓이겨 묻어버린 듯

나아갈 의욕이 사라진 채 아까운 시간을 버리고 있다.


그리운 때를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아는 고통은

연습해보는 것으로는 감히 체감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가끔 상상을 통해 미래의 시간을 끌어와

미리 걱정과 고민을 해보곤 한다.

풍부한 상상력이 가져다주는 고통은

막상 닥친 불행을 무디게 해주곤 했는데,

청춘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연습한대도

그때 가서 아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같은 날짜, 같은 시각이라도 절대 같을 수가 없는 매 순간.

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굴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결과에는 아쉽게 순응하더라도

열심히, 아니면 즐겁게.

둘 중 하나에는 맞추고 살 수 있기를.

생각하며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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