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서 강진 다산초당까지.
궂은 날씨 VS 궂은 인간
출발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쿠터를 탈 때에는 판초우의가 제격이라지만 나는 설마하니 비가 내리겠냐는 생각에 판초우의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숙소 근처에 있는 슈퍼에 들어가 문의해 봤지만 역시 있을 리가 없었다. 얇은 비닐 우의를 가까스로 겉옷에 겹쳐입고는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내륙에 차량이 많은 것이 감당이 안될 것 같기도 하고 고속도로를 탈 수 없어 많은 부분을 돌아서 이동해야해서 아예 바다쪽을 끼고 도는 코스를 선택한 이유도 있지만 멍때리고 바다를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해안 코스를 선택한 것도 있다. 해안을 낀 코스를 달리다 보면 어떠한 분노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유효했다. 나에게 미묘한 추파를 던지던 사람이 생각나 짜증나다가도 바다를 달리다보면 한순간 마음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바다에 비가 내리던, 그렇지 않던 쌓여있던 감정의 쓰레기들을 해변에 있는 자갈에 하나씩 올려놓으면 어느새 파도가 그 고민을 쓰윽 가지고 사라져버린다. 애써 내가 어딘가로 버리지 않아도 그냥 처음부터 바다에 있었던 것 마냥 스르륵 사라져 버리는 거다.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서 사고싶다는 나의 소망은 그래서 아직은 유효하다.
완도에서 다도해해상공원을 보고 올라가는 길 저 멀리 공룡커플이 보였다. 정말 의외의 풍경이라 나도 모르게 길가에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 아, 그래 여기가 공룡발자국이 발견된 그 어딘가라지. 아마도 근처에 자연사 박물관이나 공룡놀이공간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어 딱 중간지점인 이모댁에 가기 위해 서둘러 이동을 하기로 했다.
내가 목표로 한 다산초당에 들렀을 때는 정약용선생은 쓸쓸하게 흠뻑 비를 맞고 계셨다. 정약용선생님 동상이 왠지 구슬퍼 보이는 것이 그날 내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대체로 여행때는 날씨가 좋아 여행운이 좋은 편인데 이날은 이렇게 비가 내린 것을 보니 아마도 내 기분을 따라가나보다.
18년 동안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셨다고 했는데 이곳에서 우리가 알고있는 거의 대부분의 책이 저술되었다. 거의 600여권을 쓰셨다고 했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정말 책쓰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보였다. 당시(2014년)에는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정약용 선생님의 기념관 밖에 없었고 다산초당 오는 길이나 주변에 백련사 가는 길도 찾기 힘들었다. 약 3년이 지났는데 아마도 지금도 크게 바뀌진 않았을 듯 싶다.
주변에 뭐가 없어 심심하니 사색할 시간도 많을 것 같고 주변에 나무가 많고 얕은 산도 많아서 산책하기 쉬운 환경이다. 게다가 정약용 선생님은 차를 즐겨 마셨다고 하시는데, 강진은 보성 근처에 위치해서 야생차밭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수시로 백련사의 스님에게 찻잎을 구해달라고 부탁해서 스님이 난감해했다는 일화가 기억난다. 오죽했으면 호가 다산-茶山(차가있는 산)이었을까. 당파싸움에 몰려 강진까지 유배당한 그가 다산초당에 있었던 시간동안 그는 좌절하기 보다는 학자로써 책을 집필하는 것에 집중을 했다. 오히려 천혜의 조건을 만들어 준셈이 되었으니 사람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스쿠터 스트로크를 세게 당길수록 빗줄기가 내 얼굴을 더 강하게 때려왔다. 사실 처음 여정을 시작할 때 비가 오면 일정이 더 늦춰지더라도 근처 어딘가에서 숙박을 하고 갈 셈이었다. 그만큼 비가 내리는 도로는 나에게 흉기나 다름이 없었지만, 궂은 사람이란 것은 궂은 날씨를 뛰어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내가 가는 코스를 그에게 이야기 했던 것이 계속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내 여정의 딱 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이모의 집에는 출발부터 계속 걱정을 했던 엄마가 겸사겸사 내려와 있노라며 빨리오라고 나를 재촉했다. 스쿠터의 속도는 나도 모르게 점점 빨라지고, 비닐우의의 플라스틱 단추가 바람에 다 찢겨져 펄럭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큰일이야' 생각했지만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먼저라 단숨에 먼 거리를 달려갔다. 오랜만에 혼자 찾아오는 이모의 집은 익숙치가 않아서 근처 어딘가 교차로에서 신호에 멈춰있던 차를 붙잡고 길을 물었다. 바다를 끼고 커브 하는 길을 알려주던 그는 오토바이를 보면서 이야기 했다.
"아가씨, 뒷바퀴가 펑크났어요."
도대체 언제 펑크가 난 것인지 도저히 가늠이 가지 않았지만 사람에 지친 정신과 운전에 지친 몸을 돌이켜 보며 생각했다.
엎어진김에 쉬어갈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