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노동, 자본주의
두번째 만남은 첫만남에서 멀지 않은 때였다.
우연히도 M은 내가 코스로 만들고 싶어하는 동네 근처에 살고 있었고, 우리는 그에게 외국인은 잘 가지 않지만, 아니 한국인도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라 우리가 좋아하는 곳을 데려가겠노라, 당연히 좋을 것이라 장담했다.
거점 근처인 혜화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행객들은 보통 와이파이를 잡아서 쓰기 때문에 에그를 들고다니지 않는 이상은 연락이 되지 않아 약속을 잡으면 마치 핸드폰이 없던 시절 신뢰만으로 이어진 약속을 이행하는 듯 느껴진다. 예상보다 사람이 많던 역앞에서 한 5분간을 헤메이다 두리번거리고 있던 M을 만났다.
시위와 노동에 관련된 활동들이 대학로 전체에 가득차 있었고 M은 신기하게도 그다지 큰 의문을 갖지 않았다. 때는 노동절이었고 마침 청년유니온이 혜화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고 마침 아는 친구가 거기서 같이 활동중이었다. 반갑게 친구와 인사를 나누며 서로 소개시켜주고 나니 M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친구네 하며 살짝 웃었다. 정신이 없는 친구를 뒤로 하고 내가 소개시켜주고 싶은 곳으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노동절의 의미를 알아야했다.
나는 노동절의 의미를 알아야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의 저자이신 최순우님의 고택으로 먼저 발길을 옮겼다. 내셔널트러스트 기금으로 운영되는 그곳은 노동절에 문을 열지 않았다. 그곳보다 조금 더 걸어 길상사로 발길을 옮긴다. 시인 백석과 그의 연인 길상화에 대한 이야기도, 법정스님의 이야기도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했다. 바쁘게 수연 산방으로 내려가 차나 한 잔 하고싶었는데, 웬걸, 수연산방도 노동절로 문을 닫았다. 굉장히 초보적인 실수였다. 그때 라온제나는 다음 여정인 심우장의 전화번호를 어찌어찌 찾아서 전화를 돌렸다. 다행이 심우장은 문이 열려있다며 어떻게 전화번호를 찾았느냐고 놀라워하셨다. M은 노동절이니 그럴 수 있다며 위로했지만 확인 전화 하나 돌리지 못한 내가 한심했다. 내가 언제나 그러했듯 노동절에 사람들이 당연히 노동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했던 거다. 심우장으로 가는길목 대사관로에 폴란드 국기가 걸려있다. 건너편 버스정거장에 달린 폴란드 기를 보며 M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떠민다. 괜찮다고 하면서 무심한 듯 하다가 카메라를 넘기며 찍어달라고 한다. 심우장에 올라가 한용운선생님이 묵으시던 방에 들어가 성북동을 보면서 쉬는 시간이 얼마나 안정감을 주던지. 꽤 많이 걸었던 터라 긴장이 탁 풀렸다.
친구를 모시는(?) 여정이 엉망이어서 저녁이라도 잘 먹어야지 싶었는데 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막걸리 집에 들어갔다. 사실 혼자 여행하는 입장에서는 그것도 힘드니까. 전과 막걸리 그리고 무언가(?)를 시켰는데 폴란드에 이는 음식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거듭했다. 공산주의인 폴란드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경제는 괜찮아졌지만 일하는 책임과 스트레스가 얼마나 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체제가 생겨야 할 때라고 하면서 서로 동질감을 느꼈다. 또한 연차가 쌓일수록 늘어가는 책임에 비해 멈춰있는 급여를 이야기하며 본국에 돌아가면 일을 그만 둘 예정이라고 하는 것도. 독일의 난민 정책에 대해 난색을 표하며 사실은 난민, 특히 이슬람들은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더불어 자신들 나라 일자리는 점점 임금이 싼 제 3국의 사람들이 점유하고 있으며 본국 사람들은 더 나은 임금을 위해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이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회체제, 역사, 문화, 지금 뉴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빚으로 시작하는 화폐 경제에 대한 화제로 넘어가는 등 주제를 넘나들며 대화했다. 이제껏 관심이 없어 몰랐던 폴란드에 대한 지식이 한꺼번에 쭉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좋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는 어느나라나 같은 가 보다. 그는 우리의 술값을 내고 싶어했고 우리는 (엉망이 된 일정을 미안해하며) 우리가 내겠다고 했다. 강원도-부산-제주도로 가는 힘든 여정이 끝나고 다음에 서울에 올라왔을 때 한번더 보자고 말하며 확신 없는 이야기를 했다. 후담이지만, 라온제나는 그날 영어로 진행되는 대화에 약간의 두통을 느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