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현자 보아라

2023년 3월 6일 (월) 오후 8:00

by all humamwrites


엄마야,


엄마는 몰랐겠지만 내가 준비한 프로젝트가 있어.

사실 준비까지도 아니고 그냥 생각만 한 건데.


작년 겨울쯤에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다가 서한집에 관심이 생겼단 말이지. 나도 편지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가 더 잘 알겠지만 나는 어버이날이나 생일처럼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편지를 쓴 적이 없거든. 그마저도 아주 간단하고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쓰는 편이고. 일상을 공유하는 편지는 한 번도 안 써봤는데 한 번 그렇게 해보고 싶어서.




그런데 마침 내가 독일에 가게 됐잖아. 한국에서는 전화 통화를 해도 할 말이 없어서 길게 못 하지만, 아무래도 해외에 나오면 좀 할 말이 생기지 않겠어? 좋은 이야기일 수도 있고 나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벤트는 계속 발생할 거 아냐.


그렇다고 손 편지를 보내기는 너무 번거롭고, 어차피 엄마도 내 글씨 못 알아보니까 뭐… 대신 이메일로 쓰려고. 그래서 엄마 메일 주소도 확인하고, 엄마가 메일함을 안 볼까 봐 매우 친절하게 알림 설정까지 해놨단다. 출국 전날 엄마 핸드폰 가져가서 하던 게 그거였어.




솔직히 말해서 독일에 온 게 생각만큼 새롭지는 않더라. 적어도 아직은. 그냥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장소에 갔을 때랑 비슷한 기분이야.


흠 좀 웃기긴 한데 횡단보도를 보면 여기가 우리나라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여긴 횡단보도가 두 종류인데, 신호등만 있고 바닥의 줄무늬는 없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은 없고 줄무늬만 있는 횡단보도가 있어.


생각난 김에 말하자면 독일어로 횡단보도는 Zebrastreifen이래. 아무리 봐도 얼룩말에서 나온 말 같지? 방금 찾아보니 streifen도 줄무늬라는 뜻이네. 독일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얼룩말 줄무늬를 밟고 가는 거야.




횡단보도 건너는 방법-이라기에는 거창하지만-을 알려주신 건 나보다 한 학기 먼저 교환학생으로 와 계시다가 나한테 생필품을 거저 넘기고 가시기로 한 그분인데, 공항에서부터 만나 중앙역까지 같이 와서 식사도 했어. 덕분에 캐리어도 끌었고 지하철도 타고 길도 찾고… 그분 없었으면 정말 고생 많이 했을 거야. 솔직히 나 같으면 도와주다가도 지쳤을 것 같은데 그런 내색 없이 쭉 친절하게 해결해 주셔서 엄청 고맙고 멋있어 보였어.


원래 그분이랑 만나기로 했던 이유는 공연 티켓을 거래하기 위해서였어. 그분이 예매했던 독일 콘서트 표 두 장을 나한테 넘기시기로 했거든.


콘서트 표는 두 장이지만, 오프닝 밴드(본 공연 시작 전에 분위기를 달궈주는 짧은 공연을 해주는 후배 밴드 같은 거야)까지 포함하면 총 네 개의 밴드를 보게 되는 건데 다들 좋아하는 밴드들이라 기대가 많이 돼. 그중에서 인헤일러라는 애들은 엄마도 부담스럽지 않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들어보길 바란다.




여하튼 그분이랑 식사하면서 콘서트나 음악 얘기도 해서 너무 재밌었어. 취향 맞는 사람 찾기 어려운데 이렇게 만나서 반가웠고 또 이렇게밖에 못 만나서 아쉽기도 했지.


이분 포함해서, 첫 며칠에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나서 마음이 편했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해서 바로 기숙사까지 가는 건 시간도 늦고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중앙역 근처에서 하루 머물고 갔잖아? 알고 보니 거긴 한인 민박이었는데 나와 같은 방을 쓴 언니는 대학을 졸업하고 혼자 50일 유럽 여행을 오셨더라고. 시간이 늦어 첫날에는 서로 인사만 하고 잤지만, 다음 날 아침 먹고 내가 퇴실하기 전까지 짧은 시간 얘기 나눴는데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어.


그분은 거의 계획 없이 일단 여행을 시작하셨던데, 엄마가 나한테 교환 가면 뭐 할 거냐고 자꾸 물어보고 나도 아직 모른다고 자꾸 대답하던 게 생각나서 웃겼어.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엄마. 그리고 나도 지금은 교환 학생 신분으로 나온 거지만 그 언니처럼 아예 자유 여행도 해보고 싶어.


…… 이건 예고장일지도 몰라.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도록 해.




아침 식사 자리에서 다른 방의 손님도 만났는데, 그분은 부부가 함께 유럽 여행을 하다가 남편분은 먼저 들어가시고 혼자 며칠 더 머무르고 계셨어. 처음 유럽에 온 게 딱 나랑 같은 스물세 살이었대.


해외에 나와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욕심이 생기고 목표가 바뀔 수도 있을 텐데, 그럴 때 현실이나 주변을 의식해서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더라.


독일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침에 들은 말이라 더 묘했어. 지금으로서는 나한테 어떤 변화가 생길지 상상이 가지 않지만 여기서 보내는 6개월 동안 종종 떠오를 듯한 말이야.




오 햇빛.

내 방도 창밖 나무도 아직 휑한데 오늘따라 햇빛이 엄청나게 강하다. 오늘은 힘들어서 한 번도 외출 안 할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 햇살이면 생각을 번복할지도 모르겠어.


입국부터 지금까지는 나답지 않게 부지런히 나다닐 수밖에 없었거든. 그랬더니 3일 연속으로 12시 전에 잠들더라. 한국의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너무 일찍 잠들었더니 아직 어둑어둑할 때 일어나게 돼. 아직 커튼을 구하지 못해서 아침 햇살에 깨버릴까 봐 안대도 끼고 자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어. 진짜 어렸을 때도 못 했던 새나라의 어린이를 지금 하고 있다.


잠깐 다시 생각해 봤는데 역시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말아야겠어. 주말 지나면 또 밖에 나가야 하는 만큼 오늘은 얌전히 충전의 시간을 보내야지.




내일 월요일에는 드디어 제대로 된 장을 볼 예정이고, 화요일에는 시청에 가서 거주자 등록을 하고 시내 나간 김에 아시안 마트에도 가보려고. 수요일쯤에는 독일 핸드폰 번호가 생길 것 같으니 개통하는 대로 알려줄게. 비상용으로 알려주긴 하겠지만 연락은 그대로 카톡으로 하면 될 거야.


내 편지는 매주 월요일에 엄마에게 도착하는 게 목표야. 바빠지면 마감을 지키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면 사진 한 장이라도 보내줄게. 할 말이 없어도 내가 들은 노래라도 알려줄게.




우와 말하는 걸 잊어버릴 뻔했다. 제목은 이상이 쓴 편지 제목 <동생 옥희 보아라>를 따라 한 거야. 연인이랑 야반도주한 동생에게 이상이 편지를 써서 신문에 실었지. 이상 글은 중학생 때 <날개>를 몇 장 읽다가 덮어버린 게 다지만 이 편지는 참 예쁘다. 같은 제목으로 시작한 김에 같은 말로 맺어야지.


닷샛날 아침, 엄마를 사랑하는 딸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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