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3일 (월) 오후 10:52
엄마에게……
위의 ……으로 티 냈다시피 이번 주는 정말 피곤했어. 신체적 피로를 따지자면 지난주가 더 힘들었지만 이번 주에는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서 힘들었다고 해야 하나. 이번 주에 새로 알게 된 이름이 최근 2년 동안 알게 된 이름보다 더 많은 것 같아. 아니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분명히 그렇다.
플랫 메이트(기숙사가 셰어하우스 같은 형식이라, 방은 따로 쓰지만 기숙사 공용 공간을 같이 쓰는 친구를 플랫 메이트라고 해) 중에 I라는 친구랑 마주쳤는데 걔가 많이 도와주고 있거든.
I가 알려줘서 월요일에는 비공식적인 교환 학생 파티에 갔다 왔어. I랑, 한국에서도 한 번 만났던 영문학과 s언니랑 수다 떨면서 파티가 열리는 맥줏집까지 걸어갔어.
I는 우크라이나에서 왔는데 걔 말고도 많은 우크라이나 학생이 피난처럼 교환 학생으로 온 것 같더라고. 지금 석사 마지막 학기를 다니는 건데 졸업 후에는 군대에 들어갈지도 모른대.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전쟁 중이라는 게 훨씬 실감 나서 기분이 이상하더라.
독일에 오기 전에도 약간 신경 쓰였던 부분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내가 무례할까 봐 걱정이 많이 돼. 문화가 달라서 실수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역사를 모른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그 나라에 관해 아는 게 없다거나. 내 나라가 아니니까 당연히 모를 수도 있다지만 아무래도 첫인상은 그런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부분에서 정해지기도 하니까.
그리고 우리나라를 잘 아는 사람에게 가지는 호감이 얼마나 큰지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느껴서 더 신경 쓰이더라고. 술자리서 만난 또 다른 우크라이나인 친구는 한국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는 거야.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듣자마자 한국어로 인사를 해주는데 엄청 간단한 말도 외국에서 들으니까 상상 이상으로 반가워서 놀랐어. 내가 이렇게 감동을 잘 받는 사람이냐고.
이번 주에 만나 딱 한 번이라도 이야기를 주고받은 사람들의 국적을 다 모아보면 독일, 우크라이나, 모로코, 대만, 이탈리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터키, 홍콩, 일본, 라트비아, 우간다 이쯤 되는 것 같거든. 근데 그 나라 이름을 듣고 아 거기! 하고 아는 척을 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어서 아쉽기도 하고 약간 민망하기도 했어. 세계사 공부라도 하고 올걸. 하다못해 최근 세계 뉴스라도 잘 읽을걸.
그리고 화요일에는 우리 학교 화학과에서 온 다른 친구 한 명이랑 연락이 닿아서 s언니랑 셋이 만났어. 시청에 가서 거주지 등록을 하고(이걸 해야 비자 신청을 할 수 있어), 핸드폰 개통을 위해 유심을 사고, 아시안 마트에 가서 장을 봐왔지. 정말 비싸더라. 근데 좀 신기한 게 참이슬이 7,000원인데 청하가 6,000원이야. 둘 다 안 샀지만.
나는 쌀, 굴 소스, 숙주, 간장, 라면, 당면을 샀어. 참기름을 살까 말까 하다가 나중에 산다고 내려놨는데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지. 참기름… 참기름… 시름시름 참기름… 그래도 일단 쌀이 생기니까 마음이 든든해졌어.
첫날에 생활용품을 전해 받을 때 작은 밥솥도 받았는데 아직 밥솥 있는 사람이 나뿐인 것 같아서 밥 한 번 지을 때마다 한 공기씩 주변 한국인에게 나눠줬다.
여기서 하는 식사도 맛있긴 해. 목요일에는 시내 나갔다가 지중해 식당에 갔는데 소고기랑 양고기 요리랑 감자튀김 먹었거든. 요거트 소스도 맛있었고 고기도 좋았고 감자튀김은 정말 방금 썰어서 튀겼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맛있었는데. 뭔가 자꾸…… 맛있긴 한데 쌀밥이 먹고 싶고, 맛있긴 한데 칼칼한 국물을 먹고 싶어.
밥 먹고 나서는 공연을 보러 갔어. 독일이 그런 건지, 이 도시가 그런 건지, 학생 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학생은 무료로 볼 수 있는 공연이나 영화가 많아.
이번에 I가 예매해 줘서 넷이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오페라 극을 보려고 했는데, 너무 재미가 없고 이해가 안 가서 1막만 보고 도망쳤어. 어렸을 때 읽은 기억도 어렴풋이 있고 영어로 하는 거라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모르겠더라고. 문제는 네 명 다 똑같은 감상이라 그냥 나왔지.
한국에서 이런 경험을 했으면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새로운 경험을 하는 중이라 생각해서 그런가 웃기기만 했어. 혼자 갔으면 대체 어떻게 되려나 싶어 끝까지 다 봤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런 공연장도 처음 가봐서 신기했어. 연극을 하는 무대 바로 앞에는 바닥이 뚫려 있고 그 지하에 오케스트라 팀이 있던데. ……내 설명 이해해?
어쨌든 우리는 연극은 그만 보고 나가서 그냥 한잔하기로 했어. 애플와인이라는 맥주가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유명하다고 알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팔길래 다 같이 마셔봤거든. 근데 아무도 맛있다고 하지 않았어. 매실주에 물 탄 것 같았달까. 빗물 섞은 사과주스 같다는 평도 있었다.
I한테 독일 생활에 자잘하게 도움 될 만한 얘기도 듣고, 같이 독일 욕도 하고, 잘 놀고 들어왔어. 아 홍어가 뭔지도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남은 3월에 들을 독일어 수업을 위해 학교에 갔어. 첫날이라 그냥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분반을 위한 독일어 시험을 치는 것뿐이었지만.
시험지를 나눠주고 독일어를 모르면 그냥 이름만 써서 내고 가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한 절반은 우르르 나간 것 같고, 나도 첫 번째 서술형 문항에 자기소개 세줄 쓰고, 객관식 시험지 4장쯤 되는데 거기서 다섯 문제쯤 풀고 나왔어. 그랬더니 그냥 기초반에 배정되어서 또다시 발음부터 배우게 돼버렸네.
그리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서 쉬다가 저녁에는 웰컴 파티를 하러 갔어. 거기서 다른 한국인 y언니랑 좀 더 얘기했는데 그 언니도 밴드를 좋아한다는 거야. 같이 페스티벌이나 공연에 갈지도 몰라. 독일에서 한국인이랑 영국 밴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이상했는데, 나중에는 심지어 멕시코 페스티벌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상한 대화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기로 했어.
토요일에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팀별로 퀴즈를 푸는 시티 투어를 했는데 정말 너무 힘들었다. 정말 준비를 많이 해줬다고 느끼긴 했지만, 솔직히 퀴즈를 통해 얻는 정보가 딱히 유용한지도 모르겠고 일단 너무 추워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어.
같은 팀에 에티오피아에서 온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정말 옷을 얇게 입고 있었단 말이야. 티 한 장에 얇은 겉옷이 전부였으니까. 이렇게 추운 줄 모르고 겨울옷을 챙겨 오지 않았대.
그래서 그 친구 앞에서 패딩이라도 입은 내가 추워하기가 민망해서 태연한 척하고 싶었는데, 나중에는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아서 계속 추워하고 있었어. 정말 도중에 도망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니까.
그래도 일정이 끝난 후에는 멘토에게 추천받아 맛있는 햄버거집에 갔어. 독일에서 한 외식 중에 처음으로 짜지 않은 식사였어. 정말 맛있는 소고기 햄버거였는데, 독일어 메뉴판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주문했더니 좀 웃긴 문제가 있긴 했지.
햄버거 종류, 빵 종류, 패티 종류 이렇게 세 개를 선택해 주문하는 식이었는데, 귀찮아서 빵 종류를 선택할 때 번역기를 돌리지 않고 골랐더니, 그게 빵을 생략하기로 한 선택지였나 봐. 메뉴가 나왔는데 빵이 아예 없었어. 상추, 토마토, 패티만 있는 햄버거를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었다는 뜻이야.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원래도 햄버거를 먹다가 배가 부르면 빵을 남기고 패티랑 야채만 빼먹긴 해서 결과적으로는 더 좋았어. 한국에도 그런 옵션 있으면 좋겠다. 근데 이것도 햄버거가 맞나. 햄버거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 거지?
같이 식사한 친구는 나와 다른 기숙사여서 돌아가는 길에는 혼자 버스를 타고 갔어. 여기는 휠체어도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나 봐. 한국에서는 정말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여기서는 휠체어에 타신 분들이 버스를 타시는 걸 벌써 두 번 봤어. 일단 버스 문 자체가 편리한 것 같고, 주변 분들이나 기사님도 많이 도와주셔.
휠체어뿐만 아니라 자전거, 유모차, 아니면 어르신들 보조기라고 하나, 그런 것도 버스에서 많이 볼 수 있어.
이번에 나 혼자 서서 버스를 타고 갈 때도 어떤 할머니의 카트 겸 지팡이 같은 게 있었는데, 브레이크가 고장 났는지 버스 안에서 자꾸 굴러다니는 거야. 자리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팔을 뻗어서 그걸 잡아두려고 하시길래 그냥 가까이 서 있던 내가 쭉 잡아드렸어. 그랬더니 할머니가 ‘당케 쇤’이라고 하셨지.
맨날 내가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당케 쇤이라고 말하기만 해 봤는데, 내가 도움을 주고 당케 쇤을 들은 건 처음이라 좀 기분이 좋았어. 엄마 주변에서 독일어로 감사 인사를 들은 사람은 내가 처음이지 않을까? 엄마 딸을 조금 더 자랑스러워하도록.
학교에 온 이후로는 밖을 돌아다닐 때 항상 다른 친구들과 다녔고, 혼자 있을 때는 방에만 있었는데, 엄청 오랜만에 혼자 밖을 쏘다니니 좋더라. 그냥 시내에서 기숙사까지 간 것뿐이지만. 이제 이 주변도 좀 익숙해지는 것 같으니 종종 혼자 산책하러 나가려고.
이제는 정말 독일어 수업이 시작될 거야. 매번 독일어 간만 보다가 미뤄뒀는데 이번 기회에 정말 잘 배워봐야지. 남은 3월 한 달 동안은 오랜만에 학생의 본분으로 돌아가 볼게. 그런데 인간적으로 단어에 형용사 어미는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단어의 성별이랑 격에 따라서 형용사 어미가 바뀌는 게 말이 되나? 솔직히 문법은 포기했고 단어만 많이 배워갈 생각이야.
그리고 비자 신청을 하려고 해. 악명이 높아서 걱정이 좀 되는데 어쩔 수 없지, 미리미리 하는 수밖에. 오늘 비자 신청 약속을 잡는 메일을 쓸 거니까 다음 주 편지쯤에 어떤 답장을 받았는지 알 수 있겠지, 그때 다시 알려줄게.
그럼 이만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엄마 딸 지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