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7일 (월) 오후 9:30
엄마에게
벌써 또 일주일이 지났다니.
엄마 아빠는 잘 놀고 있니? 각자 직장에서도 잘 뽐내고 있는지 모르겠네. 아빠 출근 시간이 엄청 일러서 놀랐어. 그리고 엄마 방학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니까 다시 알려줘.
암스테르담에 그거 잠깐 다녀왔다고, G시가 정말 내 집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게 웃기다. 그래도 그래서 그런지 이번 주는 정말 일상을 보낸다는 기분이 많이 들었어.
11일부터는 개강이어서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갔거든. 내가 듣는 수업은 감각과 인지, 그리고 산업 및 조직 심리학인데 두 번째 수업은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온라인 수업이라 아직은 첫 번째 수업만 들었어.
정말 오랜만에 전공 수업을 듣는 거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재밌더라. 한국에서 이 과목을 듣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수업인 인지 심리학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전공은 한국에서 수업 들을 때도 영단어를 워낙 많이 써서 더 괜찮은 것 같아. 한국어 번역이 애매하다고 영어 그대로 가르치는 것도 있거든.
이건 세미나 수업이라서 절반은 교수님 강의,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그룹 토론과 전체 토론으로 이뤄지고 있어. 영어 강의를 듣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영어로 토론을 할 게 걱정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쓸모없는 걱정이었어. 애들이 그냥 독일어로 토론을 해버렸거든.
이번에는 토론 주제를 늦게 알아서 할 말도 없고 그냥 구경하는 셈 치고 가만히 있었는데 다음 수업에는 영어로 토론해 달라고 말할까 싶기도 해.
학생들끼리 독일어로 한참 이야기하다가, 그래도 마지막쯤에는 한 명이 나한테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영어로 물어봤거든. 근데 그 말을 하기 직전 독일어 대화 분위기가 아무리 봐도 ‘근데 우리 영어로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구 영어 잘하는 사람?’ ‘너 영어 수업 들었잖아’의 과정을 거치고 한 명이 총대를 멘 것 같았어. 다들 똑같구나 싶어서 웃기더라.
왜 근데 다른 나라는 질문도 많고 발표나 토론도 적극적인데 우리나라는 안 그래서 문제라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 그래서 나도 활발한 수업을 좀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않았어. 그냥 우리나라처럼 마지못해 발표하고, 아무도 질문 안 하던데. 첫 수업이라 다들 낯이라도 가리는 건지, 원래 그런 건지 궁금하다.
목요일에는 독일인 친구를 만났어. 지난주에 암스테르담에 다녀온 뒤에 바비큐 파티가 있었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 M이랑 점심을 먹게 됐거든.
M은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지 한식도 잘 알고, 어쩌면 나보다도 더 한국 방송계를 잘 알 것 같더라. 제일 최근에 본 한국 드라마에 박형식이 나온다길래 박형식이 원래 아이돌이었던 거 아냐고 물어보니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임시완이랑 같은 그룹이었던 것까지 말하더라고.
M이랑 나는 세부 취향은 다른데, 취미가 좀 비슷한 것 같아. 성향이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걔도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한대. 그런데 이 친구는 시도 쓴대. 나는 시랑은 정말 거리가 멀어서. 그래서 더 멋져 보였어. 나 윤동주 시집 딱 한 권 가져온 것도 여기 와서 한 번도 안 펼쳐봤잖아.
나만의 가게가 생긴다면 어떤 가게를 할 거고, 어떤 이름을 지을 건지에 관한 이야기도 했거든. M은 여동생 애칭이 두두고 자기 애칭이 비바라서 두비두바라는 이름의 베이커리 겸 문화 센터를 하고 싶대. 너무 귀엽지.
나한테 나만의 가게가 생긴다면, 일단 서점을 할 거고. 이름은 좀 더 생각해 볼래. 엄마는 뭐 할 거야?
그리고 토요일에는 프랑크푸르트에 다녀왔어. 가서 영화 박물관 보고 왔지. 하나도 안 알아보고 가서 큰 기대는 없었는데 잘 꾸며져 있어서 알차게 구경하고 나왔어.
프랑크푸르트에서 G시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같이 앉은 언니랑 한 얘기가 엄청 재밌었어. y언니는 작곡과에 다니거든. 연영과를 도와서 뮤지컬이나 영화음악 작곡도 한대서 너무너무너무 신기했어.
y언니도 그렇고, 초등 교육과 같은 걸 다니는 듯한 M도 그렇고, 또 화학과인 c도 그렇고. 나랑 전혀 다른 분야 사람들도 각자 바쁘게 진로 고민하고 있구나 싶어져. 중학교 애들이랑은 이런 얘기 자주 하지만 다들 비슷한 과라서 그냥 대충 그러려니 하게 되는데 여긴 별세계 이야기거든.
나도 이제 돌아가면 마지막 학기만 남은 건데 뭐라도 생각을 해가야겠지.
작년 스페인에 가 있던 d랑 통화할 때, 내가 독일에 가려고 준비하는 얘길 들은 d가 나보고 좋겠다며 부러워하기에 어이없었던 적이 있거든. 자기가 당장 유럽에 있으면서 아직 한국에 있을 뿐인 날 부러워하는 게 웃기잖아. 그런데 지금은 걔 마음을 알 것도 같아.
y언니도 지금 여기에 있는데도 벌써부터 여기가 그립대. 그 말 듣고 많이 웃었지만 또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 아직 절반도 더 남았지만 한 달 반이 이렇게 빨리 지나간 걸 보면 남은 시간도 금방 사라질 게 보이거든.
한국에서 온 친구들 다들 별 걸 하지 않아도 여기 생활을 좋아해. 별 걸 하지 않아도가 아니라 아니라 별 걸 하지 않아서 좋아하는 걸지도?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바쁘게 대학 생활하다가 온 거라 그게 이해가 가는데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나는 사실 휴학 중이었으니까 한국에 있을 때도 지금이랑 비슷하게 생활한 것 같거든.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밥 해 먹고 책 읽거나 드라마 보다가 갑자기 생각나면 전시나 영화 보러 갔다가 애들 오면 애들 만나고…….
흠 그런데 적으면서 생각해 보니까 지금은 당당하게 그럴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그때는 주변 애들이 다들 바쁘게 살고 있는 게 자꾸 보이니까 나 혼자 띵가띵가 놀아도 되나 싶은 날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이렇게 살려고 온 거니까 마음이 전혀 불편하지 않거든.
요즘 하는 최대 고민은 그냥 오늘 밥 뭐 해 먹지야. 아예 식단표를 만들어서 매주 돌려먹을까 봐.
그리고 주꾸미 볶음 먹고 싶어. 출국 날에 먹고 온 게 그나마 다행이랄지.
오는 주말에는 학과 선배가 교환 가 있는 뷔르츠부르크에 잠깐 다녀올 거야. 주중에는 대청소하는 게 목표인데 과연…….
결과는 다음 주 편지에서 알려줄게. 안녕!
엄마 딸 지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