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시에서 보내는 암스테르담 편지

2023년 4월 10일 (월) 오후 9:33

by all humamwrites


엄마에게


안녕! 오랜만에 편지를 쓰는 것 같네.


어제 같은 기숙사에 사는 c랑 h언니랑 모여서 된장찌개와 삼겹살을 먹으며 이야기하다가 부모님이랑 연락하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h언니는 이삼일에 한 번씩 통화를 한대. 그걸 듣고 살짝 죄책감이 들었지만, 나는 매일 생존 신고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도 쓰니까 대충 용서하세요.




아빠에게 엽서도 잘 보냈다고 알려줘. 생각해 보니 엽서를 보내는 것도 처음이더라고.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이래저래 귀찮긴 했는데 아빠한테 제일 예쁜 엽서를 골라 보내야 한다는 핑계로 엽서를 많이 사서 좋아.


그리고 요즘 우표는 그냥 스티커인가 봐. 침을 발라 붙이는 걸 해보지 못해서 아쉬웠어. 암스테르담에서 보낸 엽서가 언제 논산에 도착할지는 모르겠지만 글씨도 나름 잘 적었고 내용도 길게 적은 것 같아. 다음에는 어디서 보내게 될지 기대되는군.




암스테르담은 정말 좋았어. 4일 머물렀는데 첫날만 비 오고, 나머지 3일은 정말 화창했다. 우리가 떠난 후 날씨가 다시 흐려진 걸 보면 딱 우리가 머무는 날만 날이 좋았지 뭐야.


31일 밤에 스프링코스 종강 파티가 끝나고 s언니랑 c랑, 그리고 h언니랑 곧장 기차역으로 갔어. 원래는 s언니랑 c랑 여행을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계획 세우는 자리에 같이 있던 h언니도 얼렁뚱땅 같이 가게 됐어.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을 같이 보낸 홍콩 친구를 배웅해 주고(이 친구는 우리 학교가 아닌데 스프링코스만 들으러 와 있었어) 우리도 암스테르담으로 향했지. 기차가 연착된대서 불만이었는데 정작 가보니 제시간에 출발하더라고.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악명 높은 독일 기차를 경험하기 시작한 거야.




새벽에 예닐곱 시간을 가는 기차라 그때 잘 자야 했는데 나답게도 푹 자지는 못했어. 그래도 안대를 챙겨 갔더니 피곤하지 않을 만큼은 잔 것 같아. 한두 정거장 전에는 아예 잠이 달아나서 그냥 창밖을 바라보며 갔는데 파란 평야에 말이랑 소랑 양이 보여서 꼭 이렇게 편견에 들어맞는 모습을 보이나 싶어 웃겼어.


여행 삼일쯤 전에 즉흥적으로 계획한 거라 가고 싶은 곳을 못 가기도 하고, 돈도 많이 쓰긴 했는데 그래도 아쉽지는 않아. 계획하고 갔으면 놓쳤을 법한 장소도 덕분에 가본 것 같거든.


나흘 동안 미술관만 5곳을 갔고, 그 안에서도 전시가 다양해서 엄청 오랜 시간을 보냈어. 과장 좀 보태서 20시간 있었을걸? 어쩌면 과장이 아닐지도. 시립 그리고 국립 미술관, 현대미술이 많은 모코뮤지엄, 영화미술관인 아이필름 뮤지엄, 그리고 암스테르담 뮤지엄까지 갔지. 모코뮤지엄 말고는 다들 시간이 부족해서 충분히 보지도 못했어. 특히 국립 미술관은 절반도 못 봤다.




거기서 그림을 보고 있으니까 유명세에 관한 생각이 달라졌어. 엄마도 알겠지만 나는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이야. 차라리 유명해지기 싫다는 것에 가깝지. 그런데 유명해지는 게 내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어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작품들을 보는데 몇 개는 정말 그 장면이나 대상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서 나까지 기분이 좋았거든. 나도 내가 엄청나게 좋아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언가를 작품으로 남겼는데 그걸 다른 사람들이 보고 같은 감정을 느끼면 기쁠 것 같긴 해.


이런 감상은 내가 원래 알던 유명한 작품을 볼 때보다 거기서 처음 만난 작품을 볼 때 더 크게 느껴졌어. 모르는 그림들을 만나서 내 맘대로 상상하기도 하고, 설명을 읽기도 할 때가 더 재밌더라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제일 유명한 고흐 미술관에 가지 못한 게 덜 아쉬워졌어.


… 그래도 나중에 네덜란드 또 오면 그때는 꼭 갈 거야.




오기 전에 다른 교환 학생 y언니가 네덜란드에서 인종차별 폭행이 일어났다며 조심하라고 했는데(근데 웃긴 건 그 언니는 혼자 이탈리아로 여행 가면서 넷이나 뭉쳐 다니는 우릴 걱정했어), 다행히도 다들 정말 친절했어.


한번은 지하철을 서서 탔는데 내가 중심을 못 잡아 크게 휘청였더니 내 앞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를 붙잡아주셨지. 좀 걱정하시길래 농담 삼아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고 머리 위에 있는 손잡이를 잡았는데 정말 팔을 쭉 뻗어야 잡을 수 있는 거야. 어렸을 때 처음으로 손이 닿아 버스 손잡이를 잡고 뿌듯했을 때의 감정을 다시 느낄 뻔했어. 좀 민망해서 네덜란드가 나한테 너무 크다고 했더니 웃으시더라.




셋째 날부터는 거의 혼자 움직였어. 나머지 일행은 셋째 날에 튤립 축제에 간다더라고. 근데 나는 튤립도 별 관심 없고 다른 데 가고 싶은 곳도 있어서 각자 움직이다가 저녁에 만나기로 했지.


실은 다른 사람들이랑 다니면서 나 혼자였으면 안 했을 법한 여행을 하는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새로운 경험을 하는 셈 치고 쭉 같이 다니려고 했거든(홍등가 박물관도 갔다 왔다. 대마 냄새 엄청 나). 근데 첫날과 둘째 날을 보내면서 내가 미술관을 생각보다 더 좋아한다는 걸 느끼니까 굳이 튤립 보러 가는 게 시간이 아까울 것 같았어.




그래서 혼자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영화 미술관에 갔어. 우즈베키스탄 출신 영화감독 기획전을 하고 있었는데 되게 흥미로웠어. 전쟁이나 식민 이후에 자기 나라의 행동에 후회나 무의미함을 느끼고 그걸 예술로 만들어 유명해진 서구권 예술가들이 많은데, 나는 그 문학이나 예술들을 좋아하면서도, 그래서 그 피해를 나라들의 예술은 어디로 향했나 항상 궁금했단 말이지.


물론 내가 개인적으로도 서구 문화에 관심이 더 많은 탓에 모르는 것도 맞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전 세계적으로 서구 예술이 중심이 된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 영화감독이 러시아 침략 이후의 우즈베키스탄 이야기를 담은 게 많아서 관심 있게 봤어. 딱 내가 궁금했던 부분을 보여준 것 같아. 하지만 동시에 이걸 내가 결국 네덜란드에서 보고 있는 게 아이러니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단편 영화 여러 개가 틀어져 있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중 세 개만 보고 나왔지. 호랑이 이야기를 하는 게 하나 있었는데 맘에 들어서 다시 볼 수 있는지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잘 안 보이네.




그리고 지하에 있는 상설 전시 보고, 주변 산책도 하고, 길거리 핫도그도 먹고, 예술 서점도 구경한 후에, 일행을 다시 만나서 하이네켄 박물관에 갔지.


하이네켄 박물관은 생각보다 웃기고 생각보다 지루했어. 그래도 정말 좋은 마케팅인 건 확실해. 그리고 하이네켄 생맥주는 정말정말 맛있다.


예전에 I가 진짜 독일인이라면 휴대용 병따개를 들고 다녀야 한다며 자기 병따개 열쇠고리를 보여줬거든? 거기에 너무 깊은 감동을 받아서 나도 하이네켄 박물관에 갔을 때 병따개 열쇠고리를 샀단 말이지.


그런데 며칠 전에 독일인 친구를 만났더니 진짜 독일인이라면 병따개 없이도 맥주병을 딸 줄 알아야 한다는 거야! 생각해 보면 그게 더 그럴듯하긴 해. 여하튼 그래서 나는 진짜 독일인은 포기하고 그냥 독일인인 척하는 외국인으로 남기로 했어.




그리고 마지막 날에도 혼자 미술관에 갔어. 혼자 한 번 다녀보니까 너무 좋아서 또 탈주해 버렸거든.


원래 작은 전시 하나를 하는 곳인 줄 알고 잠깐 들를 생각으로 갔는데, 가는 길에 큰 미술관 있는 거야. 그냥 들어갔더니 거기서 전시를 여러 개 하고 있고 그중 하나가 내가 찾던 전시였지 뭐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또 한참 놀았지.


암스테르담에서 간 미술관 다섯 곳 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전시들이었던 것 같아. 전시가 크게 다섯 개 정도로 나뉘었는데 다들 스토리도 좋고 잘 꾸며져 있어서, 그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들도 알차게 보고 나왔어.




그리고 서점 갔다가 공원에 갔어. 그 전날에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이 정말 예뻐서 무조건 가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엄청 넓은 곳이라 크게 한 바퀴 돌 생각이었는데 예쁜 샛길이 많아서 이 길로 갔다가 저 길로 돌아오고, 요 길로 갔다가 조 길로 돌아오고, 이걸 반복하느라 입구에서 먼 곳은 가보지 못했어. 한참을 산책하다가 앉아서 책 좀 읽고 왔지.


거긴 새가 많아. 어떤 분이 오리랑 아기 오리들한테 모이 주는 걸 뒤에서 지켜봤는데 좀 어이없을 정도로 동화 같았어. 공원에서 들은 노래도 너무 완벽해서 더 좋았어. 이제 그 가수 노래 들으면 항상 이 공원 생각날 것 같아.


새도 많지만 개는 더 많고 사실 제일 많은 건 자전거야. 정말정말정말. 공원뿐만 아니라 길거리 어디에도. 나이 많으신 분들도 자전거를 엄청 많이 타는데 그게 엄청 건강해 보이더라.


엄마도 할머니 되면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는 거 어때? 비록 나는 어제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가다가 현기증이 나서 길가에 앉아 있었지만 엄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다섯 시 기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야 했는데, 우리 기차가 연착됐다는 거야. 그때까지는 그냥 그렇구나, 했는데. 조금 이따 보니 취소됐다는 거야. 그래서 놀라서 우리 기차표를 다음 기차표로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러 갔는데, 알고 보니 기차가 아예 취소된 게 아니라 암스테르담역 정차만 취소되었으니 암스테르담 다음 역까지 알아서 이동한 후에 거기서 우리가 예매한 기차를 타야 한다더라고?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여차저차 직원분의 도움을 받아서 다음 기차를 타고 돌아왔어.


이것도 웃긴데 그다음이 더 웃기다. 프랑크푸르트에서 G시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되어도 열차가 안 오는 거야. 근데 무슨 방송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우리 플랫폼에 서 있던 남자애들이 갑자기 막 다른 플랫폼으로 뛰어가는 거야.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움직이길래 우리도 왜 뛰는지도 모르면서 따라 뛰었거든. 알고 보니 우리 열차 플랫폼이 바뀐 거였어. 뛰어가는 길에 어떤 분이 dreisig라고 외치는데 와중에 그게 우리 바뀐 플랫폼 번호 13이라는 걸 알아들어서 뿌듯했다. 나 이제 독일어 a1.1 인증서도 있잖아.




그렇게 G시에 도착하니까 버스가 끊긴 시간이어서 콜택시를 부르려 했는데 이미 다른 손님을 한 분 태워 가시던 기사님이 우리를 불러서 같이 탔어. 넷이 뒷좌석에 겹쳐서 탔지.


아무도 없는 밤길이라 아주 거침없이 운전하셔서 같이 탄 c는 토할 것 같다고 했을 정도야. 중간에 표지판이 보이는데 제한 속도가 100이라는 것 같아서 와 독일의 일반 국도란 이런 건가 싶어 감탄했더니 h언니가 방금 고속도로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것 같대.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하튼 과격하지만 좋은 기사님이셨어.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여기로 이민 오신 거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게 재밌어서 기사 일이 좋다시더라고. 우리나라 손가락 하트도 알고 계셔서 한국어도 가르쳐 드렸다. 두 시 반쯤 기숙사에 도착했는데 이제 집에 돌아온 것 같아 기분이 엄청 이상했지. 네덜란드에서 독일로 ‘돌아’오다니 정말 웃긴다.




기차에서는 너무 졸려서 들어오자마자 기절할 것 같았는데(집 가서 푹 자고 싶어서 한숨도 안 잤거든) 기차역에서 나와 밤공기 맞으니까 다시 잠이 깨서 샤워하고 짐 풀고 가계부까지 쓰고 네 시가 다 되어서 잤어.


내일은 개강이라 처음으로 수업을 들으러 가볼 거야. 수업 두 개를 들을 뿐이지만 오랜만에 다시 대학생을 하려니 벌써 피곤하군. 다음 주 편지에는 좀 더 학생다운 내용을 써볼게. 다음 주에 봐요.


엄마 딸 지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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