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7일 (월) 오후8:00 / 30일 (목) 오전9:00
엄마에게
여기 온 뒤로 계속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살고 있었는데 지난 주말부터는 다시 깡통 나라의 어린이가 됐어. 주말에 하도 많이 잤더니 다시 새벽 2시쯤 자는 생활로 돌아가 버렸지. 물론 내 원래 한국 생활을 생각하면 양호한 편이지만.
주말에 패턴이 망가져서 월요일 화요일도 연달아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수요일 밤에는 다시 일찍부터 잠이 오긴 했거든. 하지만 아트인사이트 기고 글을 쓰느라고 강제로 늦게 자야 했지.
그랬더니 목요일에 늦게 일어나 버렸다!
그래서 그냥 독일어 수업을 땡땡이쳤어. 8시 10분에 나가야 하는데 눈을 떠보니 23분인 거야. 사실 부지런히 준비해서 나가면 조금만 지각하고 말 텐데 그냥 귀찮아서 이렇게 된 김에 놀기로 했지.
거지 같이 붙어 있던 방충망을 다시 붙이고, 메일 보내야 하는 것들도 확인하고, 방 정리도 했어. 그러고는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랑 커피를 마시면서 책도 읽고 독일 오기 전에 읽었던 책 필사도 했다. 그러고 있으니까 독일에서 여행하는 게 아니라 일상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던데.
카페에서 생각보다 오래 있지는 않았어. 한 시간 반 정도 있다가 나왔을 거야 아마. 내 옆자리 사람이 그사이에 세 명이나 바뀌어서 내가 너무 오래 앉아있는 민폐처럼 느껴졌거든. 내가 괜히 신경 쓴 거일 수도 있지만. 여기 카페는 어떤 문화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리고 종이 신문을 보시는 사람을 오랜만에 봐서 신기했어. 마침 신문을 독일어로 배운 상태라 Zeitung을 lesen 하시는군이라고 생각했지.
참고로 지난주 금요일에 친 독일어 시험은 매우 잘 봤다. 45점 만점에 44.5점이야. 멋지지? 사실 첫 주에 배운 내용은 별로 어렵지 않아서 그래. 알파벳부터 다시 배우고 있다 보니 몇 번 독일어를 깔짝여 본 나는 원래 아는 것들이 더 많았지. 근데 앞으로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아.
그리고 최근에는 가족 소개하는 걸 배웠어.
Das ist meine Familie. Meine Mutter ist Englsich Lehrerin. Sie liebst Kinder. Und Mein Vater ist Baum Arzt. Er ist freundlich mit der Natur. Mein Bruder arbeitet in einer Fabrik. Er ist sibenundzwanzig.
영어랑 비슷한 단어도 많고 문장이 간단해서 번역기도 잘 될 테니까 해석은 직접 해봐.
초등학생 때 하던 자기소개랑 비교했을 때 엄마 아빠 오빠 다 직업이 달라져서 신기했어. 다들 열심히 살고 있군.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학생이지롱.
이번 주는 한가하게 보낼 줄 알았는데 금요일 토요일 연달아 무척 피곤했다. 정확히는 금요일 오후부터. 원래는 분명 아무런 계획이 없었거든? 근데 금요일에 독일어 수업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갑자기 프랑크푸르트에 마라탕을 먹으러 가자는 얘기가 나와서 기차를 타려고 시내로 나갔지.
근데 마땅한 기차가 없더라고. 우리가 받은 학생증으로 헤센 주 시내 대중교통이 다 무료고 열차도 일부는 포함이 되거든. 근데 시간이 맞는 건 돈을 내야 하는 열차 종류밖에 없었어. 기차 값까지 포함된 마라탕은 너무 비싸서 그냥 포기하고 시내에서 밥을 먹기로 했지.
그래도 시내에서 한 식사도 정말 맛있었어. 엄마가 파티 같다고 한 그 사진 말이야. 양이 엄청 많았는데 맛있어서 그럭저럭 남기지 않고 잘 먹었어. 그리고 서점 얘기가 나와서 서점도 갔지. 나는 저번에는 영어책 코너만 봐서 이번에는 진짜 독일 책을 살짝 구경할 생각이었는데 결국 38유로나 써버렸어. 칼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원문도 샀다. 철학책 코너를 보는데 유명한 철학자들이 주르륵 있고 그게 다 자국 철학자들이어서 새삼 감탄이 나오더라.
그리고 커다란 옷 가게를 잠깐 구경하고 한국인이 운영하시는 카페에 갔어. 한국어로 주문하니까 마음이 정말 편해. 메뉴도 한국 메뉴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있고 심지어 달고나 라떼도 있어. 배경 음악으로도 한국 드라마 OST 피아노 버전이 흘러나왔지.
그러고 나서도 재즈 공연을 보러 갔다가, 가라오케펍에 갔다가(사람이 너무 많아 입장하자마자 나왔지만) 집에 갈 때가 되니 또 비가 오더라. 아무도 우산이 없어서 청춘 영화 찍는 기분으로 돌아왔어. 집에 왔더니 양말이 젖었더라고. 어쩐지 발이 시리더라니.
독일의 날씨가 이 꼴이라서 좋은 점이 하나 있긴 해. 교환 학생들끼리 만나서 스몰톡이 필요할 때, ‘내일은 날씨가 좋으면 좋겠다’ 라거나, ‘3월인데도 날씨가 이렇다니’라는 말을 던지면 다들 매우 공감하면서 독일 날씨 욕을 하고 자기 나라의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얘기하기 시작하지. 자기 나라 날씨가 가장 좋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야. 독일 날씨가 가장 나쁘다고 말하는 거지.
사실 날씨 안 좋기로 유명한 건 영국이잖아? 근데 영국인을 아직 만나질 못해서 걔네 입장은 어떤지 궁금해.
그리고 토요일에는 스프링코스에서 준비해 준 당일치기 본 여행에 갔어. 자유 시간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일정이 빡빡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투어를 엄청 꼼꼼히 해주시더라고. 여긴 스타벅스가 있어서(G시에는 없어. 논산에도 있는데! 논산이 G시보다 더 큰 도시인 걸까) 샌드위치랑 커피로 때웠지.
그래도 마지막에 간 박물관은 재밌었어. 2차 대전 이후부터의 독일 역사박물관이었는데 내용도 알차고 전시 퀄리티도 좋았어. 상설 전시인데도 흥미롭게 꾸며놔서 구경을 잘했지.
영어 해설자를 따라다녔는데, 관람이 끝나고 같이 있던 우크라이나 친구들이 해설자에게 고맙다고 말하더라고. 전시가 그런 내용이다 보니 해설자의(혹은 그 세대나 시절 독일인들의?) 러시아에 관한 관점이 보였을 텐데 그게 지금 우크라이나에도 힘이 되는 내용이었나 봐.
버스를 타고 G로 돌아가는 길에도 우크라이나 친구랑 같이 앉았거든. 그 친구는 독일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나랑 다른 그룹에서 독일어 해설자에게 들었는데, 그 친구도 해설자의 의견에 많이 공감했고 고마웠다고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
그 친구는 우크라이나에서 자랐지만 가족들이 러시아어를 써서 이중언어 사용자래(지금은 러시아어 소비나 사용 모두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지만). 그래서 꿈은 무슨 말로 꾸냐고 물어봤어. 내 꿈에서는 외국인들도 한국어를 쓰는데, 여러 언어가 모두 익숙하다면 자유롭게 되는 건지 항상 궁금했거든. 근데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해서 나중에 알려주겠대. 그러면서 엄청 신기한 질문이라고 재밌어하더라.
이거 말고도 많은 대화를 나눴어. 본에서 G시까지 두 시간 정도 걸리는데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내릴 때까지 안 쉬고 계속 얘기했거든. 오랜만에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외국인들이랑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대화하고 있다 보니 가끔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을 때가 있는데, 그걸 둘 다 깨닫고 웃음이 터지거나 당황할 때도 있지만, 나만 그걸 깨달았을 때는 그냥 원래 그 이야기를 하려던 것처럼 대충 넘어가기도 해. 내가 그렇게 반응하는 것처럼, 내 대화 상대도 내가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을 때 그 대답에 맞춰서 대화 주제를 바꾸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웃기다.
오늘도 낮잠을 자버려서 밤에 어떨지 모르겠네. 할 일이 많아서 잠이 안 오는 게 나을 수도 있긴 해.
3월 마지막 주에는 독일어 수업을 마지막으로 듣고 4월 초에는 개강 전까지 여행을 갈 거야. 지금은 다른 친구들이랑 이탈리아를 생각 중인데 확실한 건 없고. 나중에 다시 알려줄게.
안녕안녕.
엄마 딸 지눅.
귀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학생들이 귀하의 생신을 아는지 모르겠으나 슬쩍 티 내고 많이 축하받으시고
주말에도 남편분과 아드님과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함께하지 못해 아쉬움을 표명하는 바이며 오후에 영상 통화라도 드리겠습니다.
또한 다음 주 월요일에는 편지가 배송되지 않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그 이유는 다음 노래의 제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편지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모쪼록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