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현자 여덟 번째 보아라

2023년 4월 24일 (월) 오후 8:15

by all humamwrites


엄마에게


엄마가 답장을 고민하는 줄은 몰랐네. 하긴 나도 엄마가 답장을 꽤 오래 써주길래 놀라긴 했어. 그냥 엄마가 쓸 말 있을 때만 써. 나도 원래 할 말 없어서 전화 안 하잖아……?




나는 이제야 학교 일정이 다 정해졌어. 독일어 수업이 월수인지 화목인지 랜덤으로 정해진다고 해서 하루에 스물네 번씩 짜증 내면서 기다리고 있었거든. 수업 직전주 금요일에야 알려주더라고. 월수가 되길 바랐는데 화목이 됐어. 와중에 온라인 수업이라는 거야. 놀러 다니기에는 좀 나을지 몰라도 온라인 수업의 효율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불만스러워. 게다가 다른 수업도 아니고 언어 수업을..? 독일어 공부는 내가 따로 신경 쓰지 않으면 별로 늘지 않을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친구 사귀기에도 아쉬움이 있겠네.


이래저래 해서 학교 가는 날이 결국 화요일 하루밖에 없어. 이렇게 된 김에 수요일에는 스포츠 클럽에 하나 들기로 했어. 늦게 신청했더니 선택지가 많지 않았지만 나름 맘에 드는 걸 찾아서 검도에 등록해 놨지. 실은 태권도를 하고 싶었는데(너무 궁금하잖아) 그건 금요일이라서 맨날 주말에 여행 간다고 빠질 것 같길래. 여하튼 그래서 검도 신청은 했지만 뭐 등록 안내 같은 게 없어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또 첫 수업을 가봐야 알겠어.




수요일에 학교에 갔을 때는 로비에서 포스터를 팔아서 수업 전후로 구경했어. 어디서 온 업체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오만 데 전시를 해놨기에 신이 났지. 밴드 앨범 표지도 있고, 영화 포스터도 있고, 명화도 있고. 명화에는 실제로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봤던 것들도 많아서 신기했다. 어디서 내 취향을 그렇게 잘 알아왔는지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는데(라기보다는 그냥 유명한 것들의 나열이라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끌었던 건 ‘닥터후’라고 내가 좋아하는 영국 드라마의 반 고흐 에피소드 명장면이었어. 수업이 끝나고 곧장 다른 곳에 가는 길이라 사지 않고 그냥 왔는데 계속 아른거리네. 가격이라도 물어볼걸!


그때 청소 도구를 사러 가는 길이었거든. 봄이 이제야 올랑말랑 하길래 내가 좀 아는 척을 해줘야 하나 싶어 봄맞이 대청소를 하기로 해서 말이지. 방바닥에 맨발로 다니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밀대랑 락스랑 소독 물티슈를 샀어. 한국 같았으면 배송으로 시켰을 텐데 여기서는 어디서 사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또 빨리 오지도 않을 것 같아서 시내 마트에 갔지. 밀대를 실물로 사서 그걸 들고 거리를 걷고 식당도 가고 버스도 타서 …… 재밌었지.


청소 도구 산 날에 바로 청소 안 하면 또 영원히 미룰 것 같아서 당장 방바닥 다 싹싹 닦고 하는 김에 책상도 정리하고 이불도 빨고. 이제는 아무렇게나 누울 수 있는 맨바닥이 생겼으니 내 침대는 다시 청정 구역으로 돌아간다. 잠옷만 입고 올라갈 거야.




물건 전해받을 게 있어서 청소하다 말고 A의 친구 방에 들러서 A를 만났는데 그 방에 코코넛이 있길래 신기해했더니 하나 주더라. 실물 코코넛. 어떻게 먹는지 모른다고 했더니 그냥 칼로 쪼개거나 바닥에 던지면 깨진댔는데. 일단 아직은 못 깨서 못 먹는 중. 흠.




그리고 금요일에는 수영장에 처음 갔어. 레인 깊이가 얕은 곳은 1.2미터로 시작하는데 중반쯤부터 급경사가 생겨서 반대편은 3미터야. 레인이 길지 않아서 가려면 갈 수는 있을 텐데 쫄려서 못 건너가고 절반만 갔다가 돌아오길 반복했어. 안전 요원이 날 요주의 인물로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그렇지도 않단 말이지. 여기 사람들은 다들 수영을 잘해서 그런지 솔직히 좀 근무태만 같아. 반대편까지 가는 건 안전 요원이나 주변 사람한테 신신당부를 해놓고 도전해볼까 싶어.


오랜만에 수영하니 재밌긴 하더라. 아빠한테 수영 실력을 키워서 가겠다고 전해줘. 그래봐야 일이 주에 한 번 가면 많이 간 거겠지만. 그리고 내가 집에서 다니던 수영장보다 약간 수온이 높은 것 같아서 좋아. 여름에는 야외 수영장이 열린다던데 거기도 가볼 생각이야. 지금도 학생 할인을 받고 있긴 하지만 야외 수영장은 아예 무료로 알고 있거든. 거기 깊이는 얼마나 되려나. 벌써 두렵다.




그리고 주말에는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같은 학과 선배 u언니를 보러 갔어. 지난 학기부터 나가 있던 언니라서 오랜만에 봤지. 뷔르츠부르크를 그냥 뉘른베르크 주변 소도시로 알고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갔는데 G시랑 비교하니까 엄청 예쁜 대도시더라고. 트램도 있고 자라도 있고. 우린 그런 거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식, 중식, 일식 식당이 좀 있어. 그게 가장 중요하지. 우리는 그런 거 먹으려면 프랑크푸르트까지 나가야 한단 말이야. 언니 따라서 벚꽃도 보고 멋진 건물도 봤다. 그리고 언니 기숙사가 엄청 좋아. 월세는 우리보다 싼데 나 한국에서 살던 오피스텔보다 좋아. 억울하군.


언니랑 여행 얘기도 하고, 독일 와서 하게 된 생각도 나누고, 또 오랜만에 같은 학과 사람 만나서 진로 얘기도 하고 그랬어. 원래 친한 사람을 독일에서 만난 건 처음이라 학교 다니던 때 이야기하니까 기분이 묘하더라. 언니가 날 마중 나와서 처음 봤을 때 그때 같이 공모전 하던 너랑 지금 너랑 같은 사람이라는 게 안 믿긴다고 했는데 그 이상한 말에 공감이 갔어.




다음날에는 혼자 카페에 갔다가 기차를 타러 가려했는데 버스가 내가 내려야 하는 정거장에 안 멈추는 거야. 난 분명 제대로 탔는데! 그래서 대충 내렸더니 한적하고 예쁜 공원이 있길래 거기 그냥 또 몇 바퀴 돌고 카페에 갔어. 네덜란드에 갔다 온 뒤로 공원만 보이면 눈이 돌아가게 됐거든.


여하튼 카페에서 책 좀 읽다가 기차역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까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아마 이것 때문에 도로를 통제해서 내 버스 노선도 바뀌었던 건가 봐. 웃긴 우연 덕분에 예쁜 공원도 보고 왔지.


그리고 독일엔 기차역마다 있는 서점이 있는데 거기 구경하러 갔다가(서점에서도 뷔르츠부르크가 대도시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 왜냐하면 영어 책들이 많이 있었거든) 막스 리버만 화집 같은 책이 조그맣게 있어서 데려왔어. 볼 때마다 방충망 너머로 보는 모네(모네 그림 같은데 더 둔탁하고 어두운 느낌?) 같다고 생각하는 화가 작품인데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달까. 그러고 보니 독일 화가라 칙칙한 건가. 이렇게 편견은 더욱 견고해지고…….




책은 왜인지 비싸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산단 말이지. 책 사는 데 쓰는 돈도 좀 아까워하면 좋을 텐데. 게다가 지금은 글을 몰라도 읽기 좋은 책들을 고르느라 미술책들에 눈이 많이 가는데, 예술 서적들이 더 비싸다 보니 특히나 돈을 많이 쓰는 것 같아.


가계부 쓰는데 진짜 어려워. 현금도 많이 쓰고, 친구들이랑 다니느라 나눠낼 때도 많고, 계좌이체가 바로바로 확인되지도 않거든. (계좌이체 내역이 바로바로 확인 안 되는 게 제일 의문이야. 사람이 일일이 확인해서 진행하는 건가? 며칠씩 걸리거든. 우리끼리 무슨 이야기까지 했냐면, 우리가 이체하면 은행에서 그걸 출금해서 다른 은행으로 우편을 보내고 다음 은행에서 다시 입금시키는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어.) 진짜 이 어려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래도 어찌저찌 큰 빵꾸는 안 내고 두 달째 쓰고 있어. 나 정말 잘 쓰고 있는데 어떻게 설명이 안 되네. 조금 있으면 횡령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하나 재밌는 점은 내 가계부에 새로운 분류 기준이 하나 추가됐다는 거야. 여기서는 여행을 하도 많이 가다 보니 한국에서처럼 여행 지출을 전부 문화생활로 퉁칠 수가 없겠더라고. 그래서 카테고리 분류는 일반적으로 해놓고 이게 일상에서 쓴 돈인지 여행에서 쓴 돈인지를 구분했거든. 그랬더니 이번 여행에서 돈 얼마나 썼는지도 잘 보이고 여행 가서 어디에 돈을 많이 쓰는지도 알기 좋다. 내 가계부 카테고리에 유럽 곳곳의 도시 이름이 들어가게 될 줄이야.




오는 금요일에는 베를린에 갈 거야. 가고 싶은 미술관이 워낙 많아 혼자 뮤지엄 월드컵을 진행했지. 날이 좋길 바라는데 예보로는 썩…… 하지만 나는 비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준 독일인이니 괜찮을 거야. 딱 하루만 날씨가 화창해서 공원에서 방황할 수 있으면 좋겠군.


그럼 이만.


엄마 딸 김지눅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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