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2일 (화) 오후 8:00
엄마에게,
말했다시피 지난 주말에는 베를린에 다녀왔어. 아니다 이번 월요일까지지. 목요일 밤에 야간열차를 타고 가서 금요일 아침 일찍 도착했단다. 여기도 이제는 날씨가 좀 풀려서 드디어 패딩을 벗고 대신 카키색 점퍼를 입고 갔거든. 근데 베를린역에 내리니까 추운 거야. 그래서 큰일이다 싶었는데, 기차역이 햇빛은 안 들고 바람만 불어서 그런 거고, 밖에 나가니까 또 따땃하더라고.
이번 여행은 첫째, 셋째 날은 미술관만 돌고, 둘째, 넷째 날은 시내를 돌아다니기로 했어. 베를린에서 간 미술관 중에는 구 국립 미술관이 제일 좋았다. 거기에 아는 작품이 제일 많아서 그런가.
요즘 미술관 다니면서 생각하는 건데 엄마가 어렸을 때 사줬던 예술가 전집? 엄청 얇은 책들 시리즈로 있던 거. 그거 정말 유익했던 것 같아. 그때 이후로 딱히 미술책을 읽진 않은 것 같은데, 대충 그림 보고 어 이거 누구누구 그림……? 하면 자주 맞아. 물론 화풍이 독특한 경우의 얘기지만.
그리고 저번 주에 뷔르츠부르크에 갔을 때 막스 리버만 화집을 샀다고 했잖아? 근데 여기에 리버만 작품도 많이 있었어. 마침 그렇게 만난 게 신기하기도 하고, 하기야 내가 독일에 있으니까…… 싶기도 하고.
아쉬웠던 건 인상주의가 많다기에 베르트 모리조 작품도 있으려나 했는데 그건 못 본 것 같아. 프랑스에는 가야 있으려나 싶어. 근데 프랑스? 가면 되지. 왜냐하면 나는 지금 유럽에 있으니까. 호호.
미술관 보다 보니까 좀 요령이 생긴 것 같아. 네덜란드에서는 시간 관리 못 해서 아예 못 보고 온 층도 많았는데, 이번에는 폐장까지 남은 시간 보고, 층별로 뭐 있는지, 내가 관심 있는 게 뭔지 확인하고, 시간 분배해서 다녔거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긴 한데.
그런데 볼거리 많다고 자랑할 거면 폐장 시간도 늦춰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다른 나라에 좀 나눠준다던가. 엄마가 좀 어떻게 해봐.
그래 미술관 여러 개 다니니까 재밌는 게, 여기서 만난 화가 저기서도 만나고, 저기서 들은 역사 배경이나 종교 이야기 여기서도 보고 그래. 한 번은 보데 미술관에서 삼손(그 성경 이야기에 원래 엄청 힘이 셌는데 여자 친구한테 배신당해서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 잘린 사람) 조각상을 봤는데 거긴 아름답고 신성하게 그려놨거든. 근데 구 국립 미술관에서는 본 다른 회화 작품에는 삼손이 그냥 처절하고 잔인해 보이더라고. 두 작품을 같은 날 보니까 더 이상했어.
그리고 엄마아빠한테 혼날까 봐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사실 나 새 신발 신고 가서 너무 발이 아팠어. 원래 운동화 신고 가려고 했는데 바로 전날 너무 더러워져서 대충 빨았더니 그게 덜 마른 거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데 내가 생각을 안 했지. 그래서 며칠 전에 새로 산 워커 일단 신고 가고, 어차피 운동화 새것 사야 하니까 여행 가서 천천히 사면되겠다 했지.
하지만 문제가 발생한 게, 나는 이 브랜드 신발이 발뒤꿈치가 아프다는 생각만 해서 그건 대비를 해놨는데, 오래 신으니까 발등이 진짜 아픈 거야. 정확히는 발가락이랑 발등 사이, 걸을 때 신발 접히는 부분 말이야. 첫날밤에 돌아올 때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던데 신발 때문에 발가락뼈 부러진 걸로 독일 병원에 처음 가게 되는 건가 생각하면서 걸었어.
그래서 다음날 첫 일정으로 브런치만 먹고 곧바로 신발 사러 갔어. 다행히 맘에 드는 신발 찾아서 바로 갈아 신고 거기서 맘에 드는 티셔츠도 사버렸어. Music is the only weight on my shoulders란 문구에 레코드판 모양 지구를 들고 있는 아틀라스 그림이 그려져 있어. 진짜 멋있지. 록페스티벌에 입고 갈 거다.
모든 쇼핑을 이날 거의 다 했어. 원래 넷째 날에도 할 생각이었는데, 그날이 노동절이라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는다는 걸 여행 전날 밤에 알았거든. 진짜 거의 다 문 닫고, 큰 식당이랑 카페만 몇 개 여는 것 같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베를린이라는 대도시고 관광지인데 정말 다들 문을 닫나 싶어서 신발 가게 직원한테 다시 물어봤는데 정말로 대부분 문을 닫는다더라고. 한숨 쉬니까 웃으면서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살아남을 거라고) 해주던데 난 자신이 없다고 대답했지.
여하튼 그래서 둘째 날 시내 가서 서점이랑 문구점이랑 옷 가게 구경했어. 옷 가게는 중고 제품 판매하는 빈티지 샵만 봤는데, 옷보다는 동전 지갑으로 쓸만한 파우치가 있나 싶어서 간 거였어. 여기 동전 너무 많이 써서 꼭 하나 장만해야겠다고 두 달째 벼르고 있었거든. 근데 동전 지갑은 못 찾았고 대신 내가 우비를 사 왔어. 자세히 보면 낡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나름 멀쩡한 아디다스 남색 우비를 3만 원에 데려왔지. 얘도 페스티벌에서 입을 거다.
우비는 건졌지만 원래 목적인 동전 지갑은 못 샀잖아. 그런데! 시내 다 돌고 나와서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장이 서 있는데 거기에 프리다 칼로 파우치 같은 걸 파는 거야. 유럽 사람들 프리다 칼로 참 좋아한단 말이지. 우리나라가 고흐나 마티스 디자인 제품 엄청 팔듯이, 얘네는 칼로를 많이 쓰는 것 같아. 여하튼 거기서 작은 파우치 하나 골라서 드디어 디디어 내 동전 지갑이 생겼어. 기념품 느낌 팍팍 나는 걸로 하고 싶었는데 마침 내가 좋아하는 칼로라니 잘 됐지.
그다음이 베를린에서 제일 좋았던 곳. 이름은 일단 문화 백화점인데, 4층짜리 교보문고 같은 곳이었어. 그냥…… 거기서 길을 잃고 싶었다. 정말로. 광화문 교보문고도 엄청 넓잖아. 근데 여기는 진짜. 꼭대기서부터 시작했는데 4층을 다 보고 나니까 한 시간이 지난 거야. 그래서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싶어서 다른 데는 좀 후딱 봤어.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이야기책이랑 한병철 교수 책 홍보 엄청하길래 그거 한 권씩 데려왔단다.
이번 여행에서는 책을 네 권이나 사버렸지 뭐야. 일단 위에 말한 책 두 권이 있고. 그전에 들렀던 서점에서는 정말로 읽을 수 있을 만한 걸 사보자! 싶어서 내가 이미 읽은 책인 1984를 샀어. 다른 언어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보다는 원래 독일어가 원어인 걸 사고 싶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독일 책이 없더라고……. 미안하군.
여하튼 그러고 셋째 날 선 장터에서 중고 책을 판매하길래 구경하다 산 한 권. 그래도 얘는 2유로밖에 안 했어. 독일어 책밖에 없던데 그나마 제목이라도 읽히는 것 중에서 골랐지. Wie sie schreiben인데 ‘어떻게 쓰는가’ 뭐 이런 뜻일 거란 말이지. 근데 안에 훑어보니까 작가들 인터뷰집인 것 같더라. 근데 살 때는 몰랐는데 헤밍웨이도 인터뷰도 있어. 바로 이틀 전에 간 영화 박물관에서 헤밍웨이 사진을 봤는데 말이지. 우연도 참.
마지막 날은 별생각이 없었어. 근데 제일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생각이 없어서 그런가.
일단 상점들이 대부분 문을 닫는다니까 야외로 돌아야겠다 싶어 장벽과 공원을 가려고 하긴 했지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거든. 그래도 나름 계획대로 잘 움직였어. 구글 지도에 베를린 장벽을 치면 여러 곳이 뜨는데, 그냥 ‘장벽’이라고 된 곳은 왜 장벽인지 모르겠고, 장벽 ‘메모리얼’은 진짜 역사 기념관 같은 곳이야.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상징적인 장벽을 보려면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가야 해. 정말 긴 장벽에 정말 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하나씩 하나씩 보면서 걸어가면 생각보다 금방이야. 근데 중요한 건 그 장벽 너머에 있는 강변 공원이야! 거기가 진짜 예뻐서 앉아있다가, 누워서 졸다가, 또 책 읽다가 왔어. 햇빛이 꽤 세서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서 불쾌한 게 아니고 딱 기분 좋은 노란 햇살 정도여서 좋았다.
햇살 얘기하니까 생각난 게 첫날에도 미술관 열기 전에 공원에서 놀다가 갔거든. 그때도 엄청 좋았어. 비 올까 봐 챙겨 간 우산 펼쳐서 햇빛 가리개로 쓰고 납작 누워 있었지.
다시 마지막 날로 돌아와서, 점점 구름 끼니까 쌀쌀해지기에 밥 먹으러 가려고 일어났어. 그런데 가는 길에 버스를 탔는데 어쩌고 저쩌고 해서 노선이 바뀐다는 거야. 근데 나는 꼭 어딜 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귀찮아서 일단 타고 갔거든.
그래서 내린 곳이 크로이츠베르크라고 젊은이들의 거리……? 그런 곳이라던데 우리나라로 치면 홍대 같은 느낌이 아닐까. 여하튼 거기 내렸는데 사람이 너무너무너무너무 많았어. 온 김에 구경도 하려 했는데 그럴 수준이 아니라 그냥 인파에 휩쓸리는 기분. 어쩐지 경찰도 많더라니. 버스 노선이 바뀐 것도 그래서였고. 버스 노선이 또 어떻게 될지를 모르니 돌아가는 길에는 다른 걸 타야겠다 싶어 멀리까지 나가서 겨우 지하철을 타고 탈출했지.
대충 밥을 먹고(보이는데 들어갔는데 새로 오픈한 가게였어. 구글에도 안 뜨더라) 이제 해가 지면 문 연 곳도 잘 없고 밖에 있기도 추워서 어쩌나 싶었는데 갑자기 영화관이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찾아보니까 바로 근처에 영화관이 있고,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를 하는 거야.
내가 너무 좋아하는 영화 1917 감독이랑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같이 일하길래 궁금했는데, 촬영 감독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G시에 있을 때도 보려 했던 영화였어. 근데 시간이 안 맞아서 놓쳤던 건데 여기서는 시간도 딱 좋아서 후다닥 갔어.
독립 영화관 같은 곳이었는지, 엄청 작은 관이었고 좌석도 좀 이상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영어 소리에 독일어 자막이래서 다행이다 하고 보러 간 거였는데, 자리에 앉아서 생각해 보니까 전혀 모르는 영어 내용을 영어나 한글 자막 없이 보는 건 처음이더라고. 그래서 줄거리를 지금이라도 한 번 봐둘까 싶었다가 그냥 나를 믿기로 했다!
다행히도 농담 몇 개를 빼면 다 이해할 수 있었어. 진짜 신기하고 웃긴 건 영어를 제대로 못 들었는데 독일어 자막을 보고 아 영어 대사가 이거였구나 한 적도 있다는 거야. 독일어는 단어 몇 개만 아는 수준인데도 말이야. 영상으로 영어 공부할 때 다들 영어 영상에 한글 자막 킬 게 아니라 한글 영상에 영어 자막 키고 봐도 효과 좋을 것 같아.
장르도 확인 안 하고 갔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재밌었고 이 영화로 내 베를린 여행이 마무리되는 것 같아 좋았어. 사실 이 마지막 날은 하루에 인종 차별자를 세 명이나 만난 기념비적인 날이었는데(걱정할까 싶어 덧붙이자면 전혀 위험하지 않았고 그냥 성가시고 웃긴 정도) 마침 영화에 흑인 인종차별 내용이 있어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
근데 영화 보면서 좀 이상한 경험도 했어. 인종차별 당하는 장면이 좀 웃기다면 웃기게 연출되는데, 나는 거기서 정말 기분이 나빠서 불쾌한 헛웃음이 나왔거든. 근데 다른 관객들은 정말 재밌다는 듯이 깔깔 웃어서. 왜 예전에 엄마랑 봤던 영화 겟아웃 생각 나? 백인들 사이에 낀 흑인 주인공. 그 주인공이 된 기분이 잠깐 들었다. 근데 그냥 웃음 장벽이 낮은 것 같기도.
월요일 밤 기차로 돌아와서 지금 화요일 아침인데, 이제 수업 들으러 가야 해. 내일 드디어 비자 면접 보는 날이라 시청도 갈 거고. 원래 이번 주도 독일 안으로 여행 가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스킵하고 다음 주 월요일에만 공연 보러 프랑크푸르트 잠깐 갔다 올 거야.
근데 그러고 나서는 바르셀로나 가. 계획은 없고 일단 숙소랑 비행기는 끊어놨거든. 여하튼 그렇다고.
아빠 엽서는 다다음 주 화요일에 도착하지 않을까 싶네. 이번에는 우체국 안 가고 그냥 우체통에 넣었어. 약간 더 숙련되었다고 할 수 있지.
그럼, 이만.
엄마 딸 김지눅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