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5일 (월) 오후6:57/ 22일 (월) 오후8:00
엄마에게
엄마야 안녕.
이번에는 여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엄마한테 편지를 쓴다.
앞서 갔던 암스테르담이랑 베를린도 준비를 잘하고 간 여행이 아니잖아? 그런데 이번 여행이 그중에서도 제일 엉망으로 굴러갔어. 그래서 더 재밌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여행을 시작할 때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어. 기분이 나빴다는 건 아닌데 보통 여행을 앞둔 사람의 마음이랑은 거리가 있었다고 할까. 기대도 안 되고 살짝 귀찮다는 생각까지 들었거든.
친구들이랑 얘기할 때도 그렇고 나 혼자 생각할 때도 그렇고, 유럽에 이렇게 오래 나와 있을 일이 또 언제 있겠나 싶어서 꼭 뽕을 뽑고 가자는 식으로 굴었는데.
왜, 내가 과식하는 걸 안 좋아하잖아. 그런 것처럼 지금 이것저것 경험하는 것도 과식하는 거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내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여유가 없는데 그냥 과제 해치우듯이 새로운 곳을 방문할까 봐 걱정됐어. 그러면 당장 거거서 제대로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나중에 돌아봤을 때 기억이 잘 안 날 테고 기억이 난다 하더라도 그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을지 의문인 거야.
아직 몇 군데 가지도 않았으면서. 여하튼 그랬거든.
어쨌든 그래서 살짝 싱숭생숭했더니 비행기 탈 때도 별생각 안 들더니 이륙하자마자 눈이 감기더니 두 시간 동안 열심히 고개 꺾어가며 졸다가 착륙할 때 정신 차렸어. 솔직히 내가 스페인인지 독일인지 의식도 잘 안 됐던 것 같다. 유럽 안에서 비행기 타고 이동한 게 처음인데 출입국 심사도 없어서 더 그랬다. 비행기 내려서 그냥 걷다 보니 갑자기 지하철역에 와있어서 내가 무슨 절차를 뛰어넘고 불법 입국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
근데 바르셀로나 하늘 보자마자 바로 신나게 됐어. 공항에서 숙소까지 곧장 지하철로 이동해서 풍경을 못 보고 있다가 숙소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왔더니 딱 보이는 하늘이 너무 예쁜 거야. 공항 근처 작은 동네라 건물도 다 낮고 사람도 별로 없고.
그냥 가격이 제일 저렴해서 고른 숙소였는데 나름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숙소에 짐 먼저 맡기면서 카탈루냐어 인사 배우고, 한국어 인사도 가르쳐주고 바로 바르셀로나 시내로 갔어.
이번에는 미술관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해서 3개만 가기로 했거든. 첫 번째로 간 곳은 피카소 미술관이었어. 피카소는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 난해하잖아. 그래서 별 기대 없이 유명한 거니까 한번 본다는 기분으로 갔는데 너무 좋아서 놀랐어. 유명한 그 어려운 그림들 말고도 초기 작품부터 쭉 보여주니까 피카소가 뭘 하고 싶었던 건지 보이는 것 같았어. 많이 보이는 건 아니고, 아주아주 약간만.
그리고 피카소의 ‘소녀’라는 이름만 같고 다 제각각인 그림 스무 개쯤 보고 있자니 미술 작품들의 제목에 관한 깨달음을 얻었다. 미술관 다니면 제목이 그냥 풍경, 풍경1, 풍경2, 풍경3… 이따위인 게 많고 아예 무제도 정말 많아서 왜 그렇게 제목을 대충 짓나 궁금했거든.
근데 갑자기 문득 든 생각이, 제목이 무조건 중요한 것이라 보는 게 너무 언어중심적인 사고라는 거였어. 화가들은 그림으로 전달해야 할 걸 이미 다 전했으니까 굳이 말로 또 강조할 필요가 없는 거지. 물론 나 같은 문외한을 위해서 모두가 알아듣는 말로도 설명해 주면 참 좋겠지만…….
그러고는 쭉 고딕 지구에 있었어. 카탈루냐 성당 앞에 작은 골동품 시장이 서서 한참 구경했지. 그리고 거기서 뭘 찾았는지 알아? 밴드 로고 배지랑 키링이 여럿 있더라고. 꾸역꾸역 뒤져서 그 좋아하는 오아시스 배지랑 또 다른 밴드 조이디비전 배지를 샀다!
그리고 소나기가 쏟아져서 좀 숨어있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는 서점엘 갔는데. 사실 첫 번째로 봐뒀던 곳이 문을 닫아서 헛걸음을 했지만 가는 길에 예쁜 건물이나 재밌는 상점을 많이 봐서 괜찮았어. 그리고 두 번째로 찾아간 서점에서 조지 오웰 카탈루냐 찬가를 샀어. 못 읽고 그냥 기념품으로 생각해도 좋으니까 카탈루냐어로 살까 싶기도 했는데, 그래도 원어가 낫지 싶어 영어로 된 놈을 데려왔지.
첫날은 비도 맞고 그대로 일찍 숙소에 들어갔어. 공항 근처의 도미토리 호스텔에서 지냈는데 같은 방을 쓰는 분들 중에 미국에서 오신 할머니가 있었다. 여행 경력이 50년이라고 하시더라고. 지금은 혼자 여행하시는데 내일부터는 전남편의 여동생과 같이 크루즈 여행을 떠나신대. 엄청 태연하게 우와 그러시군요 멋지네요 하면서 속으로는 놀랐다.
흠 이번에는 여행지에서 엄마에게 편지를 써보려고 했는데 역시 어렵구먼. 오늘은 여기까지 쓰고 나중에 한 번 더 보낼게.
그럼 이만.
엄마 딸 김지눅 씀.
엄마에게
여행을 마치고 곧장 한 번 더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감기 걸려서 못했다. 사실 감기는 핑계고 그냥 귀찮아서 미루다 보니까 갑자기 주말이네. 다시 기억 더듬어서 편지 쓴다.
여행 첫날은 나름 잘 마무리됐는데 둘째 날부터는 엉망으로 굴러갔지. 둘째 날에는 카탈루냐 국립 미술관에 가기 전에 그 앞 공원에서 놀다 들어가려고 미술관 예약 시간보다 한참 일찍 갔는데 거기서 무슨 행사를 하는지 못 들어가더라고. 처음에는 특정 도로만 못 쓰는 건 줄 알고 다른 입구로 찾아가느라 주변에서 시간 낭비를 좀 했다. 그러다가 그냥 계획에도 없던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다녀왔어. 그것도 나름 재밌었지만 날이 좀 흐려서 아쉬웠지.
셋째 날에는 원래 근교에 있는 달리 미술관에 가려고 했는데 기차 예매를 안 했더니 너무 비싼 일등석, 아니면 늦은 시간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미술관은 버리고 그냥 또 시내에서 놀았어.
광장에서 길거리 공연 보고, 시장 구경하다가 또 소나기가 와서 골목골목 매장을 구경하면서 징검다리 건너듯 다녔어. 전날 해변에 갔을 때 신기했던 게 날이 흐린데도 눈이 부셨거든. 처음으로 선글라스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선글라스도 좀 봤는데, 역시 사고 싶지 않아…….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만 시야가 어두워지는 게 너무 이상하다고.
그러다가 날 살짝 갤 때 후다닥 걸어서 중고서점에 갔어. 엄청 좁고 낡은, ‘옛날 책방’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떠오르는 딱 그 이미지가 실제로 그려진 것 같은 곳이었어. 영어책도 많지 않고 보기 좋게 정리된 곳도 아니어서 오래 있지는 않았지만 소설책 한 권을 샀지.
책갈피로 쓰라고 옛날 엽서 한 장도 덤으로 주셨는데 사진 장소는 스위스인데 보낸 곳은 프랑스이고, 편지 내용은 스페인어라셨던가. 편지 내용도 알려주셨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근데 내가 그때 들으면서 꼭 여행지에서 선물로 받을 엽서에 적혀있을 것 같은 편지라고 생각했어. 번역기 다시 돌려보고 싶은데 필기체라 알아보기가 쉽지 않구먼.
책 들고는 또 근처 공원으로 갔다. 맨날 공원 얘기해서 지루하겠지만 진짜 여행 갈 때마다 꼭 찾아보는 게 미술관이랑 공원인걸……. 비 온 뒤라 잔디밭에 못 앉겠다 싶어 아쉬웠는데 하늘이 너무 맑아서 비 온 뒤 가길 잘했다고 마음을 바꿔먹게 됐지. 돌벤치나 나무 벤치는 좀 축축하긴 해도 다 말라 있었고. 바닥에 생긴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도 예뻤어. 엄청 넓어서 산책 계속하다가 벤치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었지.
앉아있는데 갑자기 앵무새가 내 옆으로 오길래 손 뻗었더니 겁내지도 않고 내 손 물고 가는 거야. 진짜 사람 손 잘 탄다 싶어서 신기했는데 조금 있다 보니까 내 바로 옆 벤치에서 밥을 주시는 분이 오시더라고. 나도 밥 주는 사람인 줄 알았나.
마지막 날도 기가 막힌다. 가우디 작품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파밀리아 성당은 원래 내부 관람도 할 생각이었거든. 근데 이틀 전에 티켓을 확인해도 표가 여유롭게 남아있길래 그냥 전날 사야지 했는데 그때가 되니까 표가 다 나간 거야. 그래서 얘도 입장을 못하게 됐어.
원래도 여행 마지막 날은 별로 계획을 안 세워놓고 그냥 하고 싶었는데 못한 거 하는 날로 남겨두는 편이긴 하지만 정말 할 일이 없어서 뭐 할까 고민하다가, 전날 지도 검색하다가 본 오래된 도서관에 가기로 했지.
말이 오래된 도서관이지, 박물관에 가까운 오래된 도서관이었어. 진짜 고서들이라 다 책장 안에 잠겨있더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책등만 봐야 하는 줄 알았는데, 거기에 실제로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 있거든? 그 사람들 중에 보니까 실제로 책 보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서 여쭤봤더니 사서한테 말하면 책 꺼내주는 시스템이었어.
사서한테 책 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안쪽 방으로 안내하는데, 거기서 컴퓨터로 검색하거나 책 정보 적힌 카드 정리함 같은 데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찾을 수 있어. 그리고 책 정보랑 내 정보를 메모지에 기입해서 사서한테 주면 사서가 그 책 찾아서 나한테 준다. 완전 신기하지.
당연히 거의 다 스페인어, 카탈루냐어일 텐데 영어로 된 거 몇 권 찾아주셔서 1880년대에 쓰인 영어 백과사전 같은 걸 찾아 읽었어! 진짜 온갖게 다 들어있던 책이라 영어로 독일어도 가르치고, 불어도 가르치고, 천문학, 생물학, 수학, 서체……. 그림도 상세해서 재밌었다.
제일 재밌었던 건 ‘친절한 상담사’라는 코너인데 그 책의 독자한테 도움이 될 만한 팁을 넣은 건가 봐. ‘나에게 맞는 직업을 찾는 법’, ‘여행하는 학생’처럼 딱 내가 읽어야 할 것만 같은 소제목이 적혀 있어서 그 부분은 정독했단다. 하지만 별로 도움은 안 됐어.
옛날 책이다 보니 학생들이 다 남자애들인 것 같던데 그래서 나한테 맞는 직업을 찾는 건 내 아내를 찾는 것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적혀 있더라고. 아내를 찾는 건 남이 도와줄 수 있지만 직업은 내가 찾아야 한다고. 그거 읽고 갑자기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랑 맞는 배우자 찾기랑 나랑 맞는 직업 찾기 뭐가 더 어려운지. 둘 다 해본 입장에서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도서관에 좀 있다가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니까 다들 슬슬 나가는 분위기길래 나도 나왔어. 직원분이 워낙 친절하게 챙겨주셔서 무차스 그라시아스 하고 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공항으로. 아무리 유럽 사이에서는 공항 출입국이 편하대도, 나야 익숙하지가 않잖아. 그래서 맘 편하게 일찍 공항 도착해서 절차 마쳐놓고, 저녁 먹고 출발하려고 했거든? 근데 이…… 내가 타야 하는 열차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안 오는 거야. 두 대나 기다리다가 결국 안 와서 다른 버스 타고 돌아가기로 하는데 그것도 시간이 잘 안 맞아서 저녁은 무슨 그냥 출발 시간 맞춰서 돌아가게 됐어.
그런데 결국 비행기 시간 늦어져서 30분쯤 늦게 출발했다. 다행이긴 한데 짜증.
아니 진짜 웃긴 게. 스페인 가니까 독일어가 반가운 거 있지. 어차피 못 알아듣는 건 똑같으면서 조금이라도 귀에 익숙한 언어가 들리면 자꾸 눈길이 간다. 독일어 하는 사람 볼 때마다 자꾸 아는 척하고 있어. 나도 독일에서 왔다고.
간단한 인사들도 계속 스페인어도 카탈루냐어도 아니고, 하다못해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로 해. 할로, 엔슐디궁, 당케. 독일에 몇 달 살았다고 십여 년을 배운 영어 내팽개치고 독일어로 인사하는 내가 어이없다.
공항에서도 이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는 비행기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있으니까 독일어가 수시로 들리는 거야. 그래서 흠 정겨운 독일어가 들리는 걸 보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구먼. 하고 고개 끄덕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서 방금 내가 한 생각이 얼마나 웃긴지 생각했어.
그리고 말이야, 나 감태 전을 먹은 적이 있나? 꿈에서 옥수수가 들어간 감태 전을 먹어서 너무 맛있었는데 내가 감태 전을 대체 어디서 먹었지? 여하튼 맛있었어.
감기는 이제 열은 안 난다. 목만 좀 아프고. 원래 감기 걸렸을 때 엄마가 해준 국수 먹으면 뚝딱 낫는데 말이야. 근데 나도 대충 국수 끓여 먹었어. 다른 한국인 언니한테 받은 참치액젓을 쏠쏠하게 잘 쓰고 있거든.
다음 주에는 프랑스 칸에 가 있을 거야. 영화제에는 안 가지만……. 어제 만난 프랑스인 친구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래도 분위기를 즐기고 오니까 괜찮을 거라고 위로해 줬어. 그러길 바라야지.
안녕!
엄마를 사랑하는 딸 김지눅 씀.